[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70) 씨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 ‘에비앙’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을 통해 되짚어보려 한다. 이입분 씨는 내 엄마다. <기자말>

엄마와 나는 같은 치과에 다닌다. 스케일링도 할 겸, 정기검진도 받을 겸, 며칠 전 함께 치과에 다녀왔다. 치석 제거만 하면 되는 엄마와 달리 나는 사랑니가 썩었단다. 마지막 하나 남은 사랑니를 뽑아야한다니, 섭섭했다. 3일 후 썩은 이를 뽑기로 하고 치과를 나섰다. 마흔 중반인 내 이빨 상태는 레진으로 씌운 이가 한 개, 금으로 때운 게 세 개나 된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 전엔 항상 이를 닦았고 지금도 뭘 먹은 뒤 양치를 안 하면 찝찝할 만큼 이 닦는 습관이 잘 잡혀있는데도 왜 이렇게 이가 자꾸 썩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일흔이 된 지금도 금으로 때운 이 세 개를 빼면 나머지는 별문제 없다. 엄마는 어떻게 이를 관리하기에 한참 젊은 나보다 이 상태가 좋은 걸까.

“그냥 양치질하는 것밖에 없어. 구석구석 살살 5분 정도 닦아. 그게 다지 뭐.”

언제부터 그렇게 양치질을 열심히 했는지 궁금했다.

“아주 어렸을 때 분가루 같은 거로 닦은 기억이 나. 아주 뻣뻣하고 억센 칫솔에 묻혀서 닦았어. 소금도 썼지. 굵은 소금을 빻아서 손으로 찍어서 이에 막 문지르는 거야. 근데 주로 분가루를 썼어. 종이로 된 동그란 통에 담겨 있었는데, 맛이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나네. 양치는 하루에 한 번, 아침에만 했어. 안 하는 사람이 더 많았어. 도시에선 어땠는지 몰라도 시골에선 정말 그랬어. 사람들 이가 노란 옥수수 색깔이었다니까.”

과장이 심한 것 같다. 내가 피식 웃었더니 엄마가 정색하며 말했다.

“이가 얼마나 누랬는지, 국민학교 3학년 때인가, 선생님이 애들한테 소금을 가져오라고 했어. 양치하는걸 알려주려고 했나 봐. 근데 안 가져온 애가 훨씬 많았지. 나도 그렇고. 선생님이 우리를 다 냇가로 데리고 가더니 소금 없는 사람은 모래로 닦으라는 거야. 이가 너무 누렇다면서. 시키니까 다들 그냥 했지 뭐. 으슥으슥 하고 안 좋았어.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니 잊히지 않네. 그 일이 충격이었나 봐.”

그렇게 이를 안 닦았으면 이가 많이 썩었을 텐데,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을까.

“그러게. 이가 안 썩더라고. 다른 애들도 누렇긴 해도 썩지는 않았어.”

엄마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늬 이모(엄마의 동생)는 이가 많이 썩었어. 생각해 보니까, 그때 큰오빠가 사탕을 사줬어. 아주 딱딱하고 하얀 사탕이 있었는데, 이모는 그걸 어려서부터 먹었거든. 이가 나면서 바로 썩어버려서 앞니가 절반밖에 없었어. 나는 단 걸 어려서부터 안 먹어서 이가 튼튼한 거 같아. 늬 외할머니도 아흔둘에 돌아가실 때까지 임플란트나 틀니 같은 거 하나도 안 하셨어.”

# 칫솔 팔기 위해 치약 만들어

엄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나 보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치약이 없어 소금으로 이를 닦고 심지어 모래를 사용하기도 했다.”(한겨레 1995.9.17.)

위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치약이 처음 소개된 것은 해방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면서 군수품으로 들어온 치약을 특수층에서 사용하면서부터다. 그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 군수물자와 함께 외제 치약 ‘콜게이트’가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50년대 초 가루치약이 생산되기도 했지만 용기가 튜브 형태인 외제 치약에 비해 사용이 불편하고 제품도 조잡해 소비자들에게서 외면을 받았다. 대신 대부분의 사람은 치약과 칫솔 대신 굵은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 이를 닦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치약은 1955년 락희화학공업사가 생산한 럭키치약이다. 락희화학공업사는 현 ‘LG생활건강’의 전신으로 원래 비닐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국내 최초로 칫솔을 만들었지만 치약이 없어 판매가 부진했다. 칫솔을 팔기 위해 1954년 치약을 개발해 이듬해부터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후 국민 대다수가 너나없이 가난했기에 치약은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다. 락희화학공업사는 신문광고뿐만 아니라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애니메이션 티브이 광고를 만들어 대대적인 치약 홍보에 나섰다.

# “칫솔에 물을 묻혀라”

1946년부터 우리나라에선 6월 두 번째 주를 ‘구강위생 강조 주간’으로 정해 치과에서 검진과 치료를 무료로 하게 했다. 이를 알리기 위해 곳곳에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는데 포스터에는 올바른 칫솔질이 실려 있었다.

“구강위생주간이라 포스타도 눈에 띄고 각처에서 강연회도 있는 모양이다. 한 가지 색다른 것은, 종전에는 좌우로 닦던 잇발을 서양 사람들 같이 이의 구조에 따라 상하로 닦으라고 외치는 점이다. 벌써 간간이하(下)형으로 생긴 묘한 칫솔로 상하 운동을 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동아일보 1958.6.13.)

반면, 1959년 럭키치약 광고에는 이런 정보가 담겼다.

“닦기 전에 칫솔을 물에 담것다가 닦아보십시오. 놀랍도록 많은 거품이 나고 깨끗이 닦여집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치약의 연마제 성분이 제 역할을 하려면 칫솔에 물을 묻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 잘못된 광고 내용으로 인해 사람들은 칫솔에 물을 묻히기 시작했고 이후 오랫동안 습관으로 이어졌다.

치약 광고의 문제는 또 있었다.

“곱게 간추린 하얀 잇빨처럼 탐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인의 입냄새처럼 품위가 낮은 것도 드물다 할 것입니다. (중략) 밤마다 화장에 정성을 기우리면서 입치장을 잊어서야 되겠습니까.”(1959.3.22.동아일보에 실린 럭키치약 광고)

성별에 따라 입냄새의 고약함이 다르기라도 한 건지, ‘여인의 입냄새’만 콕 짚어 품위가 낮은 이유를 모르겠다. 밤마다 화장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지만, 더욱 기가 막한 건 광고에 붙은 ‘충치는 밤에 미녀도 밤에’라는 문구다.

1960년대 들어 치약은 서서히 생활필수품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에 우일화학공업사, 남성화학공업, 인한제약사, 유한양행 등 여러 회사가 치약 생산에 뛰어들면서 판매경쟁도 치열해졌다. 후발주자들은 독보적으로 앞서가는 럭키치약을 따라잡기 위해 살균제의 일종인 헥사클로로펜이나 불소를 넣었다는 광고를 했고, 치약 포장지에 25만 원 상당의 티브이를 비롯해 전축, 미싱, 트랜지스터라디오 등 경품을 뽑을 수 있는 복권번호를 새겨 넣기도 했다. 치약에 추가로 넣은 성분은 효과가 미미했다.

# 서울지역 충치 발생률, 농촌지역의 두 배

치약, 칫솔 사용이 늘어도 충치는 점점 심해졌다. 특히 서울지역 충치 발생률이 높았다.

“구강 상태를 보면 대학생은 칫솔사용률이 100%이지만 학년이 낮을수록 사용 않는 자가 늘어서 국민학교 아동의 칫솔 소유율은 50%밖에 안 된다. 치약으로 식사 전 한 번 이 닦기로 구강위생의 임무를 다한 학생들은 충치가 78%(서울)나 된다. 충치는 서울이 가장 심하고 농촌지역이 발생률이 낮아서 39% 정도밖에 안 된다.”(동아일보 1968.10.03.)

서울 학생들의 충치 발생률이 농촌지역의 두 배에 달하는 이유는 기사에 없다. 하지만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소득수준이 나은 이들이 서울에 많이 살았던 만큼, 서울 아이들이 달달한 군것질을 할 기회가 훨씬 많지 않았을까. “사탕을 먹은 뒤 이모의 이가 썩었다”던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다음 기사를 봐도 추측이 타당할듯싶다.

“현대의 많은 어린이들이 충치로 고생하게 되는 원인은 전 시대의 어린이들에 비해 요즘 어린이들이 훨씬 단 것을 많이 먹는 데 있다. (중략) 충치의 근본요인은 당분이라는 것을 재인식하고 어린이의 치아를 관리하도록 한다. 될 수 있으면 어린이가 당분을 적게 먹도록 유도하는 것이 건치를 갖게 하는 비결이다.”(매일경제 1974.3.27.)

# 시장점유율 95%, 비결은?

1970년대 치약의 최강자는 시장점유율 80%를 차지한 럭키치약이었다. 치약 시장에 뛰어들었던 업체들의 추격으로 한때 63%까지 떨어졌다. 럭키치약은 가격인하 전쟁에 돌입했다. 덩치가 작은 업체들은 오래 버틸 재간이 없어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이후 럭키치약은 시장점유율 95%에 달하는 독점에 가까운 위치를 누렸다.

1980년대 들어 치약 시장에는 두 번째 주도권 전쟁이 벌어졌다. 1979년 수입자유화 조치가 시행되면서 럭키의 독주에 제동이 걸렸다. 부광약품의 안티프라그, 태평양화학의 클로즈업과 메디안, 럭키의 페리오 등이 각축을 벌였다. 색깔도 흰색에서 청색, 붉은색, 줄무늬 등 다양해지고 불소를 넣거나 약용 성분을 넣은 치약도 선보였다. 치약 회사들은 잇몸 질환이나 플라그 제거, 시린 이 등 특정 효과를 부각해 광고했다. 1992년 럭키의 점유율이 67%까지 떨어졌고 태평양 24%, 애경 4%, 부광 3% 등이 나머지를 나눠 가졌다.

그러나 그해 럭키는 ‘죽염치약’을 선보이며 재도약에 나섰다. 죽염치약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둬 1993년 한국능률협회가 뽑은 ‘올해 8대 히트상품’으로 선정됐다.

한편, 치약은 더 이상 귀한 상품이 아니었다. 19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신문에선 치약 광고를 찾아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치약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건 2016년이다.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 든 치약들 때문이다. 식약처는 메디안, 송염 등 제품 149개를 회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럭키치약 생산업체가 LG생활건강으로 이름을 바꾸고 생산하던 ‘2080치약’은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 회수 대상에서 제외됐다.

# 이는 오복 중 하나

엄마는 이와 관련한 오래된 기억을 갖고 있다.

“어릴 때 무를 먹고 있었는데, 한 이른 정도 된 할머니가 ‘이 좋을 때 잘 먹어라. 이 좋은 게 오복 중 하나다’라고 하시는 거야. 그 말이 항상 기억나. 예전에는 손에 힘을 주고 칫솔질을 팍팍 했는데, 요즘은 아주 살살 정성껏 닦아. 잘 죽는 게 중요하니까. 죽는 날까지는 건강해야 하잖아. 잘 죽기 위해서 소중하게 하는거지.”

양치질할 때마다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칫솔을 쥔 손에서 힘을 뺀다. 천천히, 정성껏 이를 닦아야지. 나 역시 잘 죽는 게 중요하니까. 남은 이를 소중하게 대해야지. 단것도 적게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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