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제안으로 최재형 4대손 일리야 최(Ilya Tsoy) 입학 예정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4대손인 일리야 최(Ilya Tsoy)가 인천대에 입학할 예정이다. 인천대는 일리야 최가 인천대 글로벌어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입국했다고 15일 밝혔다. 

최재형 선생 후손의 인천대 입학은 인천대가 제안하면서 비롯했다.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있는 인천대(국립대법인 최용규 이사장)가 최재형 선생을 연구하던 중 그의 후손이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사실을 알고 인천대 입학을 제안했다.

최재형 선생의 4대손 일리야 최.

일리야 최는 인천대의 제안을 수락했다. 일리야 최는 모스크바 공대 입학을 허가 받았으나, 인천대 제안을 수락하고 한국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그는 관련 비자를 발급받자마자 지난 12일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인천대 글로벌어학원에서 1년간 우선 한국어를 공부한 후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다.

최재형 선생의 후손이 입학하기까지 조동성 인천대 총장과 최용규 이사장,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회장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일리야 최의 학비와 체류비용은 인천대와 후원업체가 지원키로 했다.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의 페치카로 불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청사에 빛나는 항일 투사이다. 최재형 선생이 없었다면 안중근 의사도 없었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하는 데 가진 재산을 모두 바쳤다.

최재형 선생은 1860년 8월 함경북도 경원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만주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열한 살 때 무단가출해 선원 생활과 상업 활동에 종사하며 러시아어를 배우고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러시아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그는 러시아 관리와 한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통역 등을 하면서 군용도로 건설 등의 관급공사를 맡아 돈을 벌었다.

그는 부를 쌓으면서 한인들 사이에서 인심을 같이 얻어 한인사회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1893년 연추에서 도헌으로 선출된 이후 재러 한인의 생활안정, 동포 자녀들의 교육사업 등에 힘썼다. 1896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고려인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최재형 선생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국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자, 의병운동을 적극 후원하며 국권수호운동에 나섰다. 1908년 동의회를 조직해 이범윤 의병부대에 군자금을 제공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지원했다.

최재형 선생은 동포 신문인 <대동공보>와 <대양보>등을 창간해 언론사 사장으로서 동포사회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준비했던 안중근ㆍ우덕순ㆍ조도선 등의 뒤에는 늘 그가 있었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교도소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발설하지 않고 끝까지 보호했던 단지동맹의 단 한 사람이었다. 1908년 경술국치 이후 연추에 국민회를 설립해 회장으로 활동했고, 1911년에는 항일조직인 권업회를 조직해 회장에 뽑혔다.

특히 1917년 러시아혁명 후에는 전로한족중앙총회 의원,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등으로 활약하며 사회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1919년 3.1운동 이후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노령임시정부)가 1919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결성됐는데, 결성 당시 최재형 선생 집의 맞은편에 있는 건물을 임시 회의실로 사용했다. 이 또한 최재형 선생의 재정적 지원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국민의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 하나로 통합(1919년 9월 11일)되기 전 한성임시정부(1919년 4월 23일 선포), 상해임시정부(1919년 4월 11일 선포)와 더불어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을 대표하는 첫 임시정부이자, 이 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었다.

최재형 선생은 임시정부가 통합하면서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임됐고, 모든 재산을 미련 없이 독립에 쏟아부었다.

그러던 중 1920년 4월 5일 연해주에서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인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일본군은 한인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일제는 고려인 300여명을 학살하고 한인마을을 방화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최재형 선생도 일본군에 붙잡혀 4월 5일 평생의 동료 김이직ㆍ엄주필ㆍ황경섭 등과 함께 피살됐다. 남은 아들과 딸, 사위 7명 중 5명도 스탈린 시대 때 숙청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사진 왼쪽부터 최용규 국립대법인 인천대 이사장, 수원대학교 역사학과(독립운동사) 석사과정 김용진 학생, 일리야 최, 일리야 최 어머니 마리나,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회장.

최재형 선생에 대한 명예회복과 재조명 나중에 이뤄지기 시작했다. 재러 한인사회는 ‘러시아령 한인사회의 개척자’, ‘러시아 한인사회의 제일 인물’, ‘시베리아 동포의 대은인’으로 그를 추앙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재형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용규 인천대 이사장은 “최재형 선생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인물이다. 그의 후손을 한국이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밝혔다. 

일리야 최는 인천대 캠퍼스를 둘러 본뒤, 만족해 했으며 한국에 와서 고조 할아버지의 업적을 깨닫고 자긍심이 넘친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최재형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일생을 되짚어보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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