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명물 ‘김용기 명과’ 김용기 대표 인터뷰
‘54년 '정직’과 ‘신뢰’가 맛으로 스며든 추억의 ‘센베’

[인천투데이 류병희 기자] 주전부리 분야의 영원한 강자가 있다. 끼니로 따지지 않고 간식으로 여기는 과일, 떡, 빵, 과자 등 여러 가지 중에서도 과자를 따라올 주전부리는 아마 없을 것이다.

부평에 과자점을 열고 수십년 터주대감으로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다. 주전부리계의 최상위로 꼽히며 명성이 자자한 주인공은 바로 부평역 북광장 옆에 위치한 ‘김용기 명과’다.

상호에 본인의 이름을 걸고 가게를 열었다는 것은 제품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책임감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김용기 대표는 자신만의 노하우와 고집으로 1965년부터 54년 인생을 과자 만드는 일에 집중하며 한길을 걸어온 명인이다.

'김용기 명과' 김용기 대표

어려서부터 타향살이 '고생'...안해본 장사 없어

김 대표는 전북 정읍 사람이다. 1965년 고향에서 서울로 상경했고, 그 해 나이가 16세 무렵이다. 인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년 전인데, 그간 어려운 서울살이 등 지나온 날을 회상했다.

“5남매 중 막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부친 병 수발을 하는 등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어느 날 모친이 서울 고종사촌이 과자 공장을 크게 한다길래 무작정 찾아갔다. 그런데 사촌형은 작게 가게를 하고 있어서 좀 실망했다. 서울 북아현동 어느 구석이었는데, 이걸 해야 하나 많이 고민했다.”

김 대표는 그냥 집으로 가자니 모친 얼굴이 눈에 선하고, 계속 하자니 어린 나이지만 보잘 것 없으니 다른 일을 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며칠 있어보니 그냥그냥 하겠더라. 그래서 사촌형에게 일을 배웠다. 그런데 당시 과자점이 동네이 굉장히 많았다. 다들 먹고 살 방법이 마땅찮아 동네에 가게를 많이 열었는데, 과자점은 한철만 하고 여름엔 빙수, 오이, 고무줄, 밥장사 등 안해본 장사가 없다.”

서울살이는 쉽지 않았다. 사촌형이 동생이라고 좀 부려먹기도 했는데, 기술만큼은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반죽을 해도 계량하지 않고 눈대중으로 봐도 정말 맛있는 과자가 나왔다고 한다. 김 대표는 어깨너머로 과자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배운 기술을 더 연마해서 더 좋은 과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2년만에 독립, 과자 기술 자부, 맛으로 입소문

김용기 대표가 만드는 과자는 일명 ‘센베(せん-べい)’다. 전병(煎餠)의 일본식 발음인데, 일제강점기에 굳어진 이름이다. 김 대표가 6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을 때는 연탄불을 이용하다가 가스로 바꿨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왔다. 큰돈은 아니더라도 과자는 만들면 바로바로 잘 나갔다.

“사촌형에게 독립해 상도동에 가게를 냈다. 길가 옆 골목이었는데, 서울로 온지 2년 만이었으니까, 18세가 되던 해다. 장사가 잘 됐다. 과자 기술은 이미 자신이 있었다. 독립하고 처음 몇 개월 지나니까 입소문도 나고 1년 지나서 가게 3개나 하게 됐다.”

김 대표는 이 때 친형과 함께 지내게 됐는데, 가게 하나를 내주고 형은 결혼도 하게 됐다. 서울 삼각지역 앞에서 성업 중인 ‘김용안 과자점’이 바로 형이 운영하는 가게다.

“형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내가 형한테 배운줄 아는데 그게 아니다. 형은 처음에는 기술도 없고 동생인 나한테서 고생 좀 했다.(웃음) 삼각지에서 아직도 장사한다. 형제간의 우애가 과자로 이어지고 과자는 나의 인생 그 자체다”

김 대표가 만드는 과자는 맛으로 승부한다. 재료도 허투르 쓰지 않는다. 그만큼 자부심이 있고, 가격도 비교적 비싼 편이다.

“어느 날 고객 한 분이 ‘여기는 왜 비싸냐. 저 밑에 시장에 있는 가게보다 비싸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내가 그랬다. ‘그럼 그 집도 팔아주고 내 과자도 가끔 사가라’고 말했더니 웃더라. 내가 만드는 과자는 최상품을 유지하기 위해 깨부터도 강화도 풍물시장까지 가서 볶아온다. 견과류도 더 넣고, 과자 부스러기 등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다”

김용기 명과 매장 내에 있는 제품들은 모두 깔끔한 모양의 다양한 과자들이 진열돼 있다. 취재진이 과자 맛을 봤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콧 속을 엄습했다. 입에 넣으면 달지 않고 바싹바싹한 식감이 왜 이 곳을 사람들이 찾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인천살이 20년, 아들이 가업 이어받아

“30대 무렵 공항동으로 이사했다. ‘김용기 과자점’은 지금도 있는데 내가 물려준 곳이다. 몸이 좀 안 좋아서 8년 일을 쉰 적이 있다. 그리고 인천으로 온 것은 40대가 넘어서다. 처음 부평 북인천우체국 건너편에 가게를 잡았다.”

김 대표는 15년 정도 원래 있던 가게에서 장사를 하다가 5년 전에 4집 건너 부평역 쪽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처음 가게는 집 주인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집 주인이 죽고 자식들에게 상속이 되면서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했다고 한다. 가게에 투자도 하고 정도 들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사실 가게 앞 주정차 카메라는 우리 집 때문이다. 사람들이 오가다가 차를 세워놓고 과자를 많이 사갔다. 그러다보니 여기 부평역 앞을 지나는 차량이 얼마나 많이 있나. 교통 체증이 오니까. 차를 가게 앞에 세우지 못하게 아예 카메라를 설치했다.”

김명기 명과는 부평의 명물이다. 명절 때는 국내 각 지역에서 택배 물량이 몰려들어 보내주기 바쁠 정도다. 가게 앞에 교통 카메라가 설치될 정도로 문전 성시를 이뤘다.

과자 굽는 설비도 직접 황동으로 제작했다. 예전에 사용하던 기계도 보관하고 있다. 추억의 설비다. 매일 과자를 굽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 물량에 따라서 맞춰서 만든다. 현재는 아들이 가업을 잇겠다고 해서 가게 일을 배우고 과자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다.

"빵은 빵이고 과자는 과자다"

“90년대 후반 IMF가 오면서 과자점들이 다들 문을 닫았다. 나도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났고, 과자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요즘 베이커리와 프랜차이즈 카페 등 많이 생기는데, 과자는 경쟁력이 밀리지 않는다. 빵은 빵이고 과자는 과자다. 대체가 될 수 없다. 다만 골목상권이 많이 죽다보니까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 그 많았던 동네 가게들은 다 어디 갔나.”

김 대표는 10대 시절 얘기를 많이 꺼냈다. 초창기 가게에서 갑자기 손님한테 뺨을 맞은 적이 있다고 했다.

“초창기 어느 날 손님이 갑자기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어릴 때였고 당시 사촌 형과 일을 할 때였는데, 왜 그랬냐면 과자를 덜 줬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럴 리가 업었다. 보통 375g을 담아서 주는데 400g이나 줬더니 오해가 있었던 것이다.(웃음) 뭐든 정직해야 한다. 내가 만든 과자는 약간 비싸지만 맛잇게 하기 위해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 내가 뺨을 맞는 한이 있어도 먹는 것으로 장난을 치면 안된다.”

김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오랜 시간 과자 장사를 하고 손님들이 ‘엄지척’하며 알아주는 이유는 ‘정직’과 ‘신뢰’라고 말했다. 최상의 품질을 위해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품격 있는 과자를 만들기 위해 50여년을 달려왔다. 자신과의 싸움과 갈등에서 이긴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김용기 대표 부부는 20여년 인천 부평에 터를 잡고 명품 과자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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