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영우의 맥주를 읽다 (14)

[인천투데이] 양조 기술 발달로 영국에서 페일 에일이 득세할 때 현재 크라프트 비어 열풍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디아 페일 에일도 등장했다. 영국에서 러시아에 맥주를 수출하면서 오랜 항해 기간 맥주를 보존하기 위해 더 많은 홉을 사용한 임페리얼 스타우트가 만들어졌듯이, 인도에 수출하기 위해 홉을 늘리고 알코올 도수를 높인 인디아 페일 에일(IPA)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영국이 식민지 인도를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향신료ㆍ목화ㆍ비단 등 각종 재화를 영국으로 실어 날랐다. 반면 인도에서 온 재화를 내려놓고 다시 인도로 향하는 배는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싣고 갔는데, 이때 수출한 중요 품목 중 하나가 맥주였다.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은 본국 맥주를 마시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인도까지는 적도를 두 번 넘는 길고 긴 여정이었고, 긴 항해와 적도의 무더운 기후로 인해 맥주가 상하기 쉬웠다. 맥주가 인도에 무사히 도착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기존 페일 에일보다 더 많은 홉을 넣고 알코올 도수를 높였는데, 이 맥주가 바로 IPA이다.

동인도회사의 상선.

‘호지슨즈 옥토버 비어’와 동인도회사

당시 외국에 수출하기 위해 만드는 맥주에는 더 많은 홉을 넣어야하고 알코올 도수를 높여야한다는 것은 양조업자 사이에서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알코올 도수가 그리 높지 않은 6% 안팎의 ‘포터 맥주’도 이미 인도로 수출되고 있었다. 인도에 수출하는 맥주라고 해서 따로 IPA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저 오랜 항해를 견디기 위해 도수를 좀 더 높이고 홉을 조금 더 많이 넣었을 뿐이다.

런던의 양조업자 프레더릭 호지슨(Frederik Hodgeson)은 1750년대에 인도에 맥주를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이 맥주에 ‘호지슨즈 옥토버 비어(Hodgeson's October Beer)’라는 상표를 붙였다. 맥주에 상표를 붙인 건 최초다. 상표를 붙인 맥주는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호지슨이 인도로 수출한 맥주는 긴 항해 동안 무더위를 겪고 흔들리는 배에서 숙성돼 매우 맛있었다. 같은 배에 실린 다른 스타일의 맥주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는데, 특이하게도 호지슨의 맥주는 맛있게 숙성됐다. 호지슨의 맥주가 인도 수출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긴 항해로 우연하게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 이후 50여 년간 호지슨의 맥주는 인도로 수출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런 인기는 1821년 이후 급격하게 사그라지는데, 그 이유는 호지슨의 과욕 때문이었다. 런던 근교에서 보우(Bow) 양조장을 운영하던 호지슨과 토마스 드레인(Thomas Drane)은 인도로 수출하는 맥주 판매수익을 독점하고자하는 욕심에 기존 수출 창구인 동인도회사를 따돌리고 직접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점에 대해선 논란이 있는데, 당시 동인도회사가 직접 맥주를 인도로 수출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 영국에서 인도로 가는 배에 맥주를 싣고 간 것은 전적으로 상선 선장 개인의 영업행위이고 동인도회사와는 무관했다는 주장이다. 여하간 당시 영국에서 인도로 향한 선박의 다수는 동인도회사 소속이었고, 이들은 이스트 인디아맨(East Indiaman)이라 불렸다.]

당시 영국에서 인도로 떠나는 배들은 대부분 비어서 출항했으므로 화물 운임이 저렴했고, 동인도회사를 통하지 않고 이 선박들과 직접 거래해 운송료를 절감함으로써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한 것이다. 아울러 맥주 가격도 20% 인상했다.

동인도회사를 따돌리려한 시도는 결국 호지슨에게 매우 치명타를 입혔는데, 동인도회사는 일개 양조업자인 호지슨에게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을 상대가 아니었고 호지슨의 독점도 끝났다.

사진출처 pixabay

1832년, 대세로 부각한 버튼지역 맥주

1820년대 들어서서 러시아가 영국에서 수출되는 맥주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자, 러시아 수출을 주력으로 삼던 버튼온트렌트(이하 버튼) 지역 양조업자들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동인도회사의 고위 간부 캠벨 마저리뱅크스(Campbell Marjoribanks)는 버튼의 양조업자 새뮤얼 올솝(Samuel Allsopp)을 저녁식사에 초대해 새로운 제안을 한다. 마저리뱅크스는 러시아 수출길이 막혀 어려움을 겪던 올솝에게 인도로 수출할 길을 열어주겠다고 했다.

올솝은 곧바로 인도에서 인기가 높다는, 홉이 많이 들어간 페일 에일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지슨의 페일 에일보다 더 맛있는 페일 에일을 만들어냈다. 버튼 지역의 물은 석고를 많이 함유하고 있었고, 물속 석고 성분은 맥주의 색과 맛에 영향을 미쳐 호지슨의 페일 에일보다 더 맛있는 맥주를 양조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버튼의 다른 양조장들도 페일 에일 양조에 뛰어들었고, 1832년에는 버튼 지역 양조장의 맥주가 런던 양조장을 제치고 대세가 됐다. 인도 시장을 한때 거의 독점한 호지슨의 시장 점유율은 28%로 뚝 떨어졌다.

인도 열풍에 사로잡힌 영국, EIPA 등장

인도에서 인기를 끌던 IPA는 곧 영국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 맥주가 IPA라는 명칭으로 불린 때는 인도로 수출을 시작한 지 한참 지나고 나서다. 영국에서 IPA가 인기를 얻은 것은 영국 내륙 교통망이 확장된 것과 양조업자 간 경쟁이 치열해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도로 수출하는 맥주를 실은 배가 영국 해안에서 침몰했는데, 이 배에 실린 맥주가 영국에 풀리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그보다는 양조업자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영국 내륙 철도망이 발달하면서 운송비용이 매우 저렴해진 것을 결정적 요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버튼의 양조업자들은 인도에서 얻은 명성을 내세워 영국에서 판매를 늘리기 시작했다. 철도 발달로 운송료가 저렴해지고 양조장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시장이 확대됐다.

버튼 양조업자들의 공격으로 인도 수출에 애를 먹고 있던 호지슨은 판매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인도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인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향수를 자극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마침 당시 영국은 인도 열풍에 사로잡혀 있었다. 호지슨은 자신의 맥주에 ‘이스트 인디아 페일 에일(East India Pale Ale)’이라는 이름을 붙여 광고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IPA는 영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게 됐고, 하나의 맥주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 전영우는 오랜 동안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금은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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