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이 있는 클래식] 어떤 것이 조작이고, 어떤 것이 사실일까
[사연이 있는 클래식] 어떤 것이 조작이고, 어떤 것이 사실일까
  • 문하연 시민기자
  • 승인 2019.09.0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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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루트비히 판 베토벤 (상편)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1827년 3월 29일 목요일 오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밀려드는 군중 때문에 500m를 움직이는 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궁정 오페라 가수 8명이 관을 메고 카펠마이스터 8명이 관 위의 리본을 붙들었다. 프란츠 슈베르트, 카를 체르니, 프란츠 그릴파르처 등 친구 40여 명과 시인, 배우, 음악가 동료들이 왼손에는 흰색 백합을 오른손에는 횃불을 들고 뒤를 따랐다. 트롬본 연주자 4명과 가수 16명이 이 행사를 위해 편곡된 ‘네 대의 트롬본을 위한 세 개의 에클레아’를 연주했다. 이 곡은 베토벤이 1812년 린츠에서 위령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이 행사는 베토벤 장례식이었다.

극작가이자 시인인 그릴파르처는 추도사에 이렇게 썼다. “베토벤은 원래부터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으며 헨델과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의 불멸의 명성을 이어받아 이를 한층 확장한 자였다. (중략) 이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하라. 그를 묻는 자리에 우리가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렸노라.”

빈 슈바르츠슈파니어 하우스 앞의 베토벤 장례 행렬.(프란츠 크사버 슈퇴버, 1827, 수채화, 베토벤 하우스)
빈 슈바르츠슈파니어 하우스 앞의 베토벤 장례 행렬.(프란츠 크사버 슈퇴버, 1827, 수채화, 베토벤 하우스)

조작된 베토벤의 이미지

우리가 알고 있는 베토벤의 이미지는 조작됐다. 그 중심에 안톤 펠릭스 쉰들러가 있다. 쉰들러는 베토벤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의 비서였다. 베토벤의 광팬임을 자처하며 무급으로 그의 곁에 머물기를 원하는 쉰들러를 베토벤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중요한 일 처리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맡겼으며, 그가 맡은 일이란 허드렛일뿐이었다. 그는 그렇게라도 거장의 옆에서 후광을 얻길 원했다.

베토벤이 죽기 몇 주 전, 베토벤의 오랜 친구인 슈테판 폰 브로이닝과 함께 베토벤을 간호하면서 그는 베토벤의 중요한 문서들을 접할 수 있었다. 쉰들러는 ‘베토벤이 모든 자료를 그와 브로이닝에게 위임했다’고 주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토벤이 죽고 몇 주 후에 브로이닝마저 눈을 감자, 쉰들러는 그 자료들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베토벤은 말년에 귀가 들리지 않아 수첩을 이용해 의사소통했는데, 쉰들러가 소지한 베토벤의 대화수첩은 총 400여 권이었다. 그는 베토벤의 자서전을 출판하면서 그가 세워놓은 베토벤의 이미지에 맞는 부분들만 짜깁기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자료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이를 읽은 베토벤과 지인들이 반발하자, 그 증거로 대화수첩에서 뽑아낸 문구로 구성한 부분을 첨부했다.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그리고 그중 136권을 베를린 왕립도서관에 비싸게 팔아먹고 260여 권은 태워버렸다. 나중에 밝혀진 내용을 보면, 그는 베토벤과의 친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이 베토벤과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며 깊은 대화를 주고받은 것처럼 내용을 조작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가 만들어 놓은 영웅이 된 천재의 이미지를 좋아했다. 쉰들러는 이런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던 베토벤의 순수한 이미지를 지키고 싶은 좋은(?) 의도라고 했지만, 우리는 결국 베토벤 삶의 진실과 멀어져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베토벤이 쏟아놓은 무수한 명언과 독특한 행동 중에서 어떤 것이 조작인지, 어떤 것이 사실인지를 알 수 없게 됐다.

어린 베토벤을 돈벌이 수단으로

베토벤(13세) 초상화.(1783, 작자 미상)
베토벤(13세) 초상화.(1783, 작자 미상)

베토벤은 1870년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손자 베토벤과 동명)과 아버지 장 판 베토벤은 둘 다 성악 가수였고 대대로 궁정 악장을 지냈다.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마그달레나 케베리히는 열여섯에 결혼해 아들을 낳았지만 얼마 후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었다. 아버지 장은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이 결혼을 극심히 반대했으나 둘은 결혼했다. 베토벤을 포함해 7남매를 낳았는데 3형제만 살아남았다.

베토벤의 어머니는 성정이 너그럽고 인자했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어린 베토벤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려한 비정한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모차르트를 데리고 연주여행을 다니며 돈을 번 것을 떠올리며 자신도 베토벤을 이용해 돈을 벌 계획을 세웠다. 그는 어린 베토벤을 방에 가두고 종일 피아노만 치게 했다. 베토벤이 여덟 살이 됐을 때 대중 앞에서 그를 여섯 살이라 속이고 연주하게 했다. 1778년 3월 26일 음악회를 아래와 같이 광고했다.

“1778년 3월 26일에는 슈테르넨가세의 음악 아카데미 홀에서 선제후 궁정의 테너 가수 베토벤이 제자 두 명을 선보입니다. 아베르동 호팔티스틴 양과 자신의 여섯 살배기 아들(=루트비히 판 베토벤)입니다. 이들은 아름다운 아리아 여러 곳을 부르고 피아노협주곡과 트리오를 연주할 것입니다. (중략) 예매하지 않은 분들은 1굴덴을 내야하고, 입장권은 앞에서 이야기한 아카데미 홀이나 뮬렌슈타인의 클라렌 씨에게서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승,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

베토벤의 연주는 모차르트 연주만큼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지 않았지만, 다양한 연주 경험은 베토벤을 성장하게 했다. 그는 인근 교회 여러 오르가니스트에게 다양한 기법을 배웠다. 또한 어머니 사촌인 프란츠 로반티니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는데, 로반티니는 본 궁정악단 단원이며 명망 있는 음악가로 베토벤과 함께 살며 그를 지도했다. 베토벤은 이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여러 연주자의 ‘잼 세션’에 참가해 예술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는데, 이는 뛰어난 그의 즉흥연주 실력을 한층 높여줬다.

이런 베토벤에게 스승이라 칭할만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바로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다. 베토벤이 네페한테서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은 ‘좋은 음악이란 극단적 개인의 무한한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철저하게 교육했으며, 1783년 ‘음악잡지’에 베토벤의 연주 기사가 실렸다.

“앞서 언급한 열한 살배기 아들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앞날이 촉망되는 인재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연주할 수 있고 초견 실력(=처음 보는 악보를 미리 연습 없이 바로 연주할 수 있는 능력)도 뛰어나다. 베토벤은 네페에게 배운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완전히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다. (중략) 이 어린 천재는 이제 연주여행을 위한 지원을 받게 됐다. 그가 처음처럼 계속 성장해 나간다면 틀림없이 제2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될 것이다.”

어린 천재라 불린 베토벤은 10세까지 초등교육을 겨우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했기에 산수나 쓰기 능력은 현저히 낮았다. 덧셈과 뺄셈은 가능하지만 곱셈부터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활본능은 누구보다도 강해 셈은 빨랐다.

베토벤은 열 살 때부터 네페를 보조하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관례에 따라 무급이었지만 1784년부터는 정식으로 제2 궁정 오르가니스트가 돼 연봉 150굴덴을 받았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첫 작품을 출판하는데, 그게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과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 선제후’다.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네페의 권유에 따라 제목을 ‘선제후’로 정했으며, 선제후에게 헌정됐다.

베토벤은 점점 네페의 협소하고 권위적인 방식에 불만을 느꼈고, 네페는 베토벤의 고집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베토벤은 새로 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스승의 비판이 싫었다. 그러다 보니 한때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약 10년이 지나서야 베토벤은 네페에게 그간의 마음을 풀고 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선생님이 내가 행하는 신성한 예술이 발전하게 나에게 자주 건넸던 충고를 감사히 생각합니다. 내가 언젠가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선생님 덕분입니다.”

네페는 1787년과 1792년 베토벤이 본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인 빈으로 갈 수 있게 선제후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빈에서 모차르트를 만나다

1787년, 처음 빈을 방문했을 때 베토벤은 그곳에서 모차르트를 만났다. 17세 베토벤과 31세 모차르트가 한세기 안에서 피아노를 앞에 두고 얼굴을 마주한 엄청난 순간이었다. 쉰들러에 의하면, 첫 만남에서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푸가의 주제를 주고 즉흥연주를 청했다. 그가 건넨 주제는 연주하기 매우 까다로운 것이었다. 베토벤의 연주를 들은 모차르트는 짧고 강렬하게 논평했다.

“베토벤은 머지않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

[참고 문헌] 베토벤(얀 카이에르스, 홍은정, 도서출판길) / 루트비히 판 베토벤(메이너드 솔로몬, 김병화, 한길아트) / 베토벤 평전(박홍규, 가산 출판사)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지원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