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벌새(House of Hummingbird)│김보라 감독│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한 소녀가 복도식 아파트 902호 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찾고 있다. 초인종을 몇 번이고 눌러도, 문을 열어달라는 다급한 외침에도 대답이 없다. 무슨 일이 생기려고 저러나, 이 영화가 스릴러 영화였나, 고민하는 찰나. 바짝 긴장했던 게 무색하게도 소녀는 한 층을 더 올라가 1002호 초인종을 누르고 엄마가 문을 연다. 휴~ 그냥 집을 잘못 찾은 거였다.

때는 유난히 무더웠던 1994년 여름. 집을 잘못 찾아갔던 소녀는 중학교 2학년 열다섯 살 은희(박지후)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남자친구와 연애는 즐거운 평범한 중학생이다. 부모는 아파트 상가에서 떡집을 운영하고 있고 대치동에 살면서도 공부를 못해 8학군이 아닌 강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는 언니와 외고를 거쳐 서울대에 들어가야한다는 부모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있는 중3 오빠와 함께 산다.

은희의 집은 은희의 표현을 빌자면 ‘콩가루 집안’이다.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권위적인 아버지(정인기)는 춤바람이 나서 엄마 속을 썩인다. 가사노동과 떡집 일을 모두 돌보느라 집에 들어오면 말 그대로 ‘떡 실신’을 하는 엄마(이승연)는 은희에게 도무지 관심을 주지 못한다. 언니 수희(박수연)는 공부에는 별 관심도 없이 밤늦게 돌아다니기 일쑤다. 그때마다 은희의 도움을 받아 도둑처럼 몰래 집에 들어오곤 한다. 오빠 대훈(손상연)은 부모의 기대와 총애를 받고 있는 유일한 자식이지만 수가 틀리면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어느 날 은희가 다니던 한문학원에 교사 영지(김새벽)가 새로 부임한다. 영지는 지금까지 은희가 만났던 어른들과는 다르다. 입버릇처럼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는 유치한 구호를 외치게 하는 담임선생과도, 서울대에 입학할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 오빠만 챙기는 아버지와도, ‘공부해서 여대생이 되라’고 당부하던 어머니와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냐고 묻는, 함부로 동정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누구라도 널 때리면 가만히 있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당부하는 영지는 은희에게 구원이자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유일한 어른이다.

은희에게 1994년 여름은 유난히 지독하다. 더 없이 살갑게 굴던 남자친구 지완(정윤서)과는 헤어졌고 단짝친구 지숙(박서윤)과는 문구점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사이가 틀어져버렸다. 은희가 좋다고 고백까지 했던 후배 유리(설혜인)는 여름을 넘기며 마음이 변해버린다. 그렇게 아픈 여름을 보내고 맞은 가을,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사랑받고 싶은 열다섯 소녀의 여름과 가을, 누구에게나 있었을 그 순간을 매우 섬세하게 담아낸 영화다.

서사를 이끄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은희를 지켜보는 관객은 내내 불안하고 안타깝고 가끔은 잔잔한 미소를 띠다가 결국은 눈물을 터뜨리게 된다. 138분이라는 꽤 긴 러닝타임을 빈 틈 없이 메우는 건, 조용하지만 격정적으로 요동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스펙터클한 어떤 영화보다 더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벌새는 날갯짓을 1초에 많게는 90번 하는 작은 새다. 영화에 담긴 은희의 두 계절은 아주 작고 특별할 것 없는 이의 짧은 시절일지 모르나 은희의 열다섯은 벌새만큼이나 간절한 날갯짓으로 가득하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지, 이런 관용적인 말들에 묻혀있던 내밀한 경험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보여준 영화 덕에 모처럼 내 마음의 성장을 돌아본다. 만나고 이별하고 상처받고 아파하면서 마음의 나이테가 한 줄 한 줄 늘어났던 게지.

열다섯. 한 세계가 무너졌다.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영지의 말처럼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보면, 그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면 세상은 여전히 신비롭다. 아름답다. 여전히 살 가치가 있다. 두 시간 넘게 극장에 앉아 있었으면서도 은희의 열여섯, 열일곱… 그리고 40대에 접어드는 은희의 삶도 지켜보고 싶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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