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어렸을 땐 ‘명절’ 하면 윷놀이나 한복, 잡채, 전 같은 게 생각났다. 친척들과 왕래도 없었고 가난한 집엔 엄한 부모님만 있으니 마냥 신나진 않았다. 그래도 학교에 가지 않는 건 좋았다.

시간이 흘러 언니와 남동생, 내가 차례로 결혼하고난 뒤부턴 명절이 달라졌다. 부부 양쪽 집으로 흩어져 다 함께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나는 결혼 후 무려 여섯 번의 명절을 먼 시가에서 보내느라 친정 식구들을 만나지 못했다. 오로지 ‘며느리’로서 명절은 공허함만 남겼다. 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반복된 노동도 숨이 막혔다.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번번이 ‘며느리’ 역할에 짓눌려 명절마다 남편 고향으로 향하던 내가, 3년 전 추석을 앞두고 이제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명절을 보내기로 하자고 선언했다. 남편 뜻은 중요하지 않았다. 명절과 관련해 내 목소리가 소거된 상태로 이미 몇 년을 보냈으니 이제 내가 말할 차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결혼했다고 해서 괴로워져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혼하기 전처럼 ‘각자’ 자신의 명절을 자유롭게 보내는 것, 그뿐이다.

남자 쪽에서 먼저 차례를 치르고 난 뒤 여자 쪽으로 가는 풍습도, 남의 조상 차례음식을 만들며 친정 식구를 그리워하는 일도, 시댁에선 내가 ‘너’ 또는 이름으로 불리고 친정에선 남편을 ‘O서방’이라 높여 부르는 걸 보며 감정이 상하는 일도, 이젠 남 얘기가 됐다. ‘대이동’의 대열에서 벗어나 보내는 명절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그러나 명절을 앞두고 여전히 누군가는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한 ‘명절 전 증후군’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리란 걸 안다. 또 다른 누군가는 1년에 두 번 있는 명절, 며칠만 잠깐 참으면 되는데 뭘 그리 유난이냐고 말할지 모른다. 이런 이들이 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 있다. 지금 이 시대 여성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삶이 녹아든 책들이다. 가뜩이나 일 많고 머리 아픈 명절에 글자 많은 책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술술 넘어가는 만화책으로 골랐다.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위치에 있든, 이 책 세 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한다. 깊이와 재미를 모두 갖춘 책을 자신 있게 소개한다.

# 며느라기 | 수신지 글ㆍ그림 | 귤프레스 펴냄

이 책은 2017년 페이스북 계정에 연재한 만화를 모아 펴낸 것이다.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고, 만화가 올라오는 즉시 무수히 달린 ‘사이다 댓글’들로 댓글 창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인공 민사린은 졸업 후 우연히 대학 동기 무구영을 만나 연인이 됐고 축복 속에 결혼했다. 사린은 구영과 함께 눈 뜨는 행복한 아침을 맞이했지만, 며느리로서 요구되는 여러 가지 일도 함께 얻었다. 사린은 결혼 후 처음 맞은 시어머니 생일과 시부모 결혼기념일을 챙기기 위해 사무실에서 바쁘게 일하는 틈틈이 음식 하는 법을 검색하고 식당을 예약하는 등 애쓰지만, 정작 남편은 늦잠을 잔다. 시댁 식구들 중 설거지를 마친 사린의 후식 과일을 챙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의도와 다르게 자신의 존재가 자꾸 지워지자, 사린은 궁금해졌다. 한 번도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자신이 왜 스스로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되고자 애쓰고 있는지를.

“그러니까 내가 미움 받을까봐 가만히 있었다, 이 말이지?” “내가 안 하다가 갑자기 하면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네가 시켜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실 거 아니야.” “나는 일하고 있는데, 네가 일한다고 나를 미워하시면, 그런 어머니를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해?” “너야말로 그렇게 싫었으면 못한다고 하지 그랬어.” “뭐, 거기서 어떻게 못한다고 해?” “나도 마찬가지야. 거기서 어떻게 내가 한다고 그래? 나라고 편하게만 있은 줄 알아? 나도 괴로웠다고.” (201-203쪽)

위 인용문은 사린과 구영이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내용이다. 나는 이 만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이날 어린 조카가 스케치북에 그린 제사 풍경을 꼽는다. 시어머니와 사린, 그리고 구영을 비롯한 ‘무씨’ 남자 세 명, 총 다섯을 그린 그림에서 시어머니는 퀭한 눈으로 팔이 네 개 달린 채 정신없이 일하고 사린은 웃는 얼굴로 전을 수두룩하게 부치는 반면, ‘무씨’ 성을 가진 세 남자는 점잖게 넥타이를 맨 채 웃으며 아무것도 안 하고 나란히 서 있다. 아이의 눈엔 이 이상한 상황을 만드는 건 ‘무씨’ 세 남자만이 아니라, 다섯 어른 모두였을 것이다.

이 책은 있는 그대로 사실과 현실감 있는 대화를 그림에 담을 뿐, 변화 방향을 제시하거나 변혁적인 결과를 보여주진 않는다. “맞아, 맞아.” 맞장구는 쳤으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에 대한 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많은 공감을 얻었으면서도 이 만화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동글동글 정감 있는 그림체와 극단적이지 않은 상황 묘사로 편안하게 책장이 넘어가면서도 자꾸 신경 쓰이는 무언가가 가슴에 남는 것이 이 만화의 장점이다. “신혼인 여성이 평범해 보이는 일상 안에 깔린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인식해가는 과정을 거악에 대한 묘사 없이도 서늘하게 그려냈다.” ‘2017 오늘의 우리 만화’ 심사평 중 일부다.

# 두 여자 이야기 | 송아람 지음 | 이숲 펴냄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서공주와 그림 그리는 박콩, 두 친구가 각각 서울과 대구에서 보낸 어느 시기를 그린 만화다. 겉모습부터 성격도, 하는 일도, 사는 곳도 다르지만 둘은 세상 누구보다 뜨거운 꿈을 품고 있다. 대구에 사는 서공주는 오직 서울에서 잡지 편집자가 되겠다는 목표로, 사장의 성희롱을 참아가며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 집 보증금을 모은다. 막상 서울에 올라왔지만 비싼 월세와 저임금에 ‘경제적 빈곤 앞에서 “꿈 따위 X까라 그래!”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서공주는 서울을 떠나기로 하고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린다.

“그동안 무명 언론사에서 굴러먹다 겪은 각종 수모와 성희롱을 쓰자면 백과사전도 모자랄 지경이다. (중략) 파란만장한 3년이었다. 나를 ‘걸핏하면 감상에 빠져 냉정한 사고는 할 줄 모르는’ 한심한 여자 기자로 봤던 김 팀장 놈이 지긋지긋했는데, 유명 잡지사라는 곳은 한술 더 뜨고 이 지랄. 아니, 노예를 뽑을 거면 노예를 모집한다고 해야지 왜 인재를 모신다는 헛소리를 해대는 걸까.”(162쪽)

서울에 사는 박콩은 시가가 대구와 가깝다. 명절마다 대구에서 서공주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기대는 쉽게 무너졌다. 술에 취해 뻗어버린 백수 남편과 울며 보채는 아이, 그리고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의 미묘한 막말 대잔치 속에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잠시 숨 돌릴 틈이 없다. 홧김에 집을 나오고 나서야 박콩은 서공주와 술 한 잔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자괴감이 든다. 참나, 여자라 이거지? 아무리 잘났든 결혼한 여자는 남편, 시부모 뒷바라지나 하는 존재라 이거지? 이게 뭐야? 돈도 벌어야 되고, 남편 눈치 시부모 눈치 다 살펴야 되고, 애는 껌 딱지고, 명절만 되면 노예가 따로 없고…. 야, 넌 절대 결혼하지 마라. XX!”(27쪽)

저자는 이 책으로 “여자들에게 결혼은 과연 축복일까? 가족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일까? 자기만의 꿈을 좇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물으며 현실이지만 외면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 엄마들 | 마영신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이 책에는 주인공 소연과 친구 셋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 50대 ‘엄마들’은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있다. 소연은 남편의 도박 빚을 갚느라 단란주점에서 밤일하며 젊은 날을 다 보내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과 이혼한 뒤 건물 청소일을 한다. 소연에겐 오래된 애인이 있고, 그 애인의 또 다른 애인과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기도 한다.

소연의 친구들도 연애에 관심이 많다. 저마다 먹고사느라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성희롱을 일삼는 소장에게 항의하기 위해 노조를 만들고, 소장에게 폭행당한 동료를 응원하고, 애인들과 나이트클럽에 가고, 연하남과 짜릿한 연애를 한다.

이 ‘이상한’ 엄마들은 작가 마영신의 실제 엄마와 친구들이다.

“엄마는 내게 멜로디와 핵심 가사를 던져주었고 나는 다듬고 첨삭하여 세상에 내놨다. 개인적으론 이 만화를 그리면서 엄마의 삶을 전보다 더 이해하게 되었다. 전에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전국의 수많은 등산객 아줌마 아저씨들, 뒤풀이로 아귀찜 식당 따위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어른들도 이제는 어쩌면 훗날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바라보게 된다.”(370쪽, 작가의 말)

작가는 “엄마가 깔깔깔 웃으며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다. 다른 누군가의 엄마들도 그렇게 봐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이 시원시원하고 캐릭터 강한 ‘엄마들’을 많은 독자들이 만났으면 좋겠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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