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수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 올해는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정한 지 1100년이 되는 해다. 왕건은 42세 때인 918년 6월, 궁예를 몰아낸 후 철원성 포정전(布政殿)에서 왕위에 올라 ‘고려’를 열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자신의 고향이자 세력 근거지인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당시 송악은 철원보다 해상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선전됐다.

왕건은 도읍이 위치한 군현의 행정 편제와 명칭도 고쳤다. 신라 때 송악군의 치소(治所)에 도읍을 두면서도 군현 조직을 개편해 인근 개성군도 관할 영역에 포함했기 때문에, 그 지위는 군(郡)보다 높은 주(州)로, 이름은 개성군과 관련이 있으면서 새 왕조를 연다는 의미로 열개(開)자를 써서 개주(開州)로 정했다.

개주는 개성ㆍ덕수ㆍ임진ㆍ송림ㆍ강음 등의 현을 관할했고, 치소(읍치)는 현 개성 시내에 조성됐다. 도읍 이름은 개주의 치소에 경(京)을 뒀기 때문에 ‘개주에 있는 경(서울)’이라는 의미에서 ‘개경’으로 불렸고, 이외에 송악ㆍ송도 또는 경성ㆍ경도ㆍ왕경 등으로도 불렸다.

고려보다 2년 먼저 건국한 거란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송의 배후에 있는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993년(성종 12) 소항덕을 보내 고려를 침입했다. (서희와 담판한 소‘손녕’은 소항덕의 '자'이다.) 거란은 고려가 충실하게 사대하지 않자, 자신들이 책봉한 목종을 마음대로 폐위하고 시해했다는 구실로 1010년(현종 1) 다시 침입해 개경을 함락했다. 그 때 현종은 나주까지 피란했다.

현종은 그 후 개경 재건과 방어를 위해 도읍을 둘러싼 산세를 이용해 23km에 달하는 토성을 쌓는데,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개경 나성(羅城)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정도 110년만에 축조된 개경의 상징 나성은 당초 알려진것처럼 1009년(현종 즉위)에 시작해 20년 만인 1029년(현종 20)에 완공한 것이 아니라, 1029년에 50일이라는 단기간 공역으로 축조된 것으로 파악됐다.

1231년(고종 18) 8월, 몽골이 ‘금’ 정벌 일환으로 고려를 침공했다. 몽골군이 충주까지 침입했다가 이듬해 정월 돌아갔지만, 몽골이 지금의 평안도 일대인 북계지역을 장악하자 고려정부는 1232년 6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을 택했다. 천도 결정 직후, 송악군을 개주로 승격한 전례에 따라, 강화현을 군(郡)으로 승격해 도읍으로서 행정적 기반을 보강했다. 강화가 강도(江都)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1270년 5월,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37년 10개월간 고려 도읍은 강도에 재현됐다. 급박한 상황 요인도 있었겠지만, 당시 집권한 무인세력이 집권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고려왕실의 성소(聖所)이자 상징인 궁궐 등 개경의 도읍 시설을 그대로 가져오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경 환도 이후 강도는 몽골(원)에 의해 철저히 파괴돼 강도 시절 흔적은 성곽과 능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하에 묻혔다. 개경에 비해 자료도 부족하기 때문에 강도의 궁성(본궐)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우리 역사공동체에게 강도 시대의 최대 역사적 의미는 ‘외세에 의해 멸망하지 않고 고려를 유지해 조선에 넘겨줬다는 데 있다’고 평가받는다. 강도의 실체 규명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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