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김복동’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뜻을 모으고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는 평화나비네트워크 활동가들이 화해치유재단 출범 이사장 기자간담회에서 기습 점거 시위를 벌이다가 끌려 나가는 장면이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 버티고 목소리를 높이고 경찰에게 연행되지 않기 위해서 기를 썼다. 울음을 터뜨리고 ‘위안부’ 문제를 이렇게 흐지부지 만들 수 없고 반드시 사과 받고 해결해야한다고 소리쳤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나는 속수무책 기분으로 그들의 분노를 헤아리려 노력했다. 이들은 어째서 ‘위안부’ 피해자의 일에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말하려하는 걸까.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이기 이전에 이것은 너무나 그들 자신의 일처럼 보였다.

이 장면은 머릿속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 내게 ‘관심을 가진다’는 게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 꼬리를 물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말한다. 관심을 가진다는 게 뭘까, 왜들 그렇게까지 하는가,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인생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럴까. 어쩌면 관심을 가진다는 건 피곤한 일을 자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순전히 ‘그렇게 하는 게 좋아서’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보통의 업무보다도 더 과중해지는 게 ‘관심’이다.

애정 없이는 애초에 관심을 잘 가질 수도 없고 지속시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이때 애정이란 오로지 내면의 즐거움이나 자발성에 기초해 발생한다.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그러한 ‘내적 자발성’이 처음부터 숭고한 차원으로 의미화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자기집중적’ 조건이 포함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녀의 에세이 ‘모든 사람은 혼자다’에서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짚은 바 있다. 타인은 정말로 나의 희생을 원했는가? 설령 그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해도, 타인의 만족이 희생의 궁극적 보상은 아니다. 희생의 보상은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나’의 발견이다.

우리는 보부아르의 이러한 헌신에 대한 관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남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의 요점은 타인의 고통이 ‘나의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에 있다.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이 해결되게 애써야한다는 의식과 행동의 기저에는 ‘나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때 지금 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압도감이 자리한다.

따라서 희생의 숭고함이란 실제로 타인을 향하기 때문이라기보다도 ‘나 자신의 희생에 대한 만족감’에서 일차적으로 비롯하는 것임을 제대로 바라볼 때에야 비교적 왜곡 없이 수행된다. 만약 ‘나는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는 명제에 깊이 갇히게 된다면 결국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인정을 갈구하게 되고 텅 빈 행동만이 남을 것이다.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개인의 재미와 흥미를 넘어선 문제일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기 위해서 어떤 사명감을 거는 일이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명제에서 그것이 ‘나’를 위한 일임을 제대로 인지할 때 자기와 타인을 기만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관심을 가진다’고 말함으로써 무엇을 자신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는가를 드러내 보인다. 이타심이 자기 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관심을 가진다는 것 또한 자기 관심의 정체를 제대로 마주하려는 데서 비롯함을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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