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전영우의 맥주를 읽다 (13)

[인천투데이] 맥주가 현대적 모습을 갖춘 것은 18세기 이후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네스 맥주의 기원인 포터 맥주가 등장한 것도, 세계 시장을 평정한 라거 맥주가 자리를 잡은 것도, 크래프트 비어 열풍의 핵심인 인디아 페일 에일 IPA 맥주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따라서 18세기와 19세기는 맥주의 가장 중요한 시기다. 기술 발달로 맥주 양조 방식이 진화해 보다 더 균일한 품질의 맥주가 대량 생산된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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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생산된 최초의 맥주 ‘포터’

1700년대 초반 영국에서 포터 맥주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포터는 이름 그대로 런던의 짐꾼들이 주로 마신, 진한 색깔의 맥주였다. 포터는 맥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맥주 중 하나다. 포터 이전의 맥주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통일성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지역마다 소량으로 생산했기에 일관성도 없었다. 홉을 넣은 맥주도 있었고 넣지 않은 맥주도 있었다. 맥주 스타일의 명칭도 제각각이어서 같은 맥주도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포터는 이런 혼란스러운 맥주 세계에서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갖고 대량 생산된 최초의 맥주였다.

당시 영국 런던의 술집은 ‘쓰리 쓰레즈(three threads)’라는 술이 유행이었는데, 문자 그대로 나무통 세 개에서 숙성된 서로 다른 종류의 맥주를 손님 취향에 따라 섞어서 판매하는 술이었다. 당연히 술집마다 맥주 맛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런던의 한 양조장에서 색이 엷은 맥아와 진한 맥아를 섞어 양조한 맥주를 출시했는데, 쓰리 쓰레즈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좋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 맥주는 ‘인타이어 버트[Entire Butt, 버트는 108갤런(408리터) 용량의 나무통을 지칭]’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기존 맥주처럼 작은 통에 담긴 여러 종류의 맥주를 섞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큰 통에 한 가지 맥주만 담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붙은 명칭이었다. 이 맥주는 런던의 짐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짐꾼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라는 의미로 포터로 불렸다.

포터가 인기를 얻자, 곧 대량 생산을 시작했고, 한 가지 맥주만을 대량 생산하기에 생산단가는 내려갔다. 가격이 내려가자 주머니가 가벼운 노동자들이 더욱 더 포터를 찾았고, 포터 는 런던에서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포터는 맥주 유통방식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포터 이전 맥주는 양조장에서 발효를 마친 맥주통을 개별 술집이 받아서 직접 숙성하는 방식이었다. 각 펍에서는 맥주를 숙성시킬 저장고가 필요했고, 맥주를 양조장에서 받아오고 난 후에도 각자 방식으로 숙성시켰다. 따라서 같은 양조장에서 맥주를 받아왔어도 숙성시키는 방법에 따라 맥주 맛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전통적인 영국 펍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맥주를 공급하는데, 그 펍 고유의 숙성 조건으로 개성 있는 맥주 맛을 만들어내기에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포터는 양조장에서 숙성을 모두 마치고 난 후 출고돼 유통된 최초의 맥주다. 술집들은 양조장에서 맥주를 받아오자마자 판매할 수 있게 됐다. 그만큼 비용이 절감돼 더욱 저렴한 가격에 팔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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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의 진화, ‘스타우트’와 ‘임페리얼 스타우트’

영국에서 인기를 얻은 포터는 곧 아일랜드로 전파됐는데, 아일랜드의 기네스는 영국의 포터보다 더 진한 색의 맥주를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포터보다 더 강한 맥주라는 의미에서 ‘스타우트(stout: 강하다) 포터’로 불리다가 추후 영국의 포터와 구별해 아일랜드에서 양조된 강한 흑맥주는 스타우트로 불렸다. 기네스의 스타우트는 큰 인기를 얻고 세계 맥주 시장을 평정했다. 1880년대에 기네스는 세계 최대 양조업체가 됐고 상당 기간 최대 양조장으로 군림했다.

영국 런던에서 탄생한 노동자들의 술 ‘포터’는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698년 영국을 방문한 러시아 표도르 1세는 영국의 매력에 푹 빠져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는데, 영국 맥주 중에서 도수가 높은 포터 즉, 스타우트를 특히 사랑했다. 표도르 1세의 스타우트 사랑으로 러시아는 영국 맥주를 수입하는 큰손이 됐고, 영국 양조장은 러시아로 수출할 맥주를 양조하느라 바빠졌다.

처음 영국에서 러시아로 수출한 맥주는 오랜 여정으로 상해버렸다. 런던의 바클레이 (Barclay) 양조장에서는 오랜 여정을 견딜 수 있게 홉을 다량으로 넣어 보존성을 높인 맥주를 만들어 러시아로 수출했는데, 이 맥주가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러시아 황제를 위해 양조한, 알코올 도수가 높고 홉이 많이 들어간 스타우트 맥주는 ‘임페리얼 스타우트’로 불리며 하나의 맥주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표도르 1세의 뒤를 이은 예카테리나 2세(1762~1796)도 영국의 맥주를 매우 즐겼고, 러시아라는 큰 수출 시장을 붙잡은 영국의 양조업자들은 러시아에 수출할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적극적으로 양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의 양조장 밀집지역인 버튼온트렌트(Burton-on-Trent)의 양조장에서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많이 양조했다. 러시아로 맥주 수출은 1822년까지 호황을 누렸으나, 그 이후 러시아에서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하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창백한 엷은 색의 맥주 ‘페일 에일’의 등장

러시아 수출길이 막히고 1800년대 초반에 새로운 양조기술이 발달하면서 영국에서도 포터의 인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바로 창백한 엷은 색의 맥주인 페일 에일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 온도계와 냉각 코일의 발명으로 양조업자들이 양조과정을 세밀하게 컨트롤 할 수 있게 됐고, 비중계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효율적으로 맥아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양조 효율이 높아져 제조 단가가 낮은 엷은 색 맥아를 사용한 페일 에일 맥주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페일 에일’은 색이 진한 포터와 같은 과거의 맥주에 비해 색이 엷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영국에서 코크스를 사용해 볶은 엷은 색의 페일 맥아로 빚은 페일 에일이 처음 판매된 것은 1690년이었고, 1750년 이후에 페일 에일 스타일의 맥주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양조 기술 발달과 더불어 1800년대 이후에 페일 에일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버튼온트렌트 지역 물이 페일 에일 맥주를 양조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영국에서 맥주 양조의 중심지는 런던에서 버튼온트렌트로 옮겨갔다.

※ 전영우는 오랜 동안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금은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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