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70) 씨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 ‘에비앙’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을 통해 되짚어보려 한다. 이입분 씨는 내 엄마다.<기자말>

가스레인지에 불을 켤 때마다 ‘삐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스가 새나 싶어 화구에 코를 갖다 대봐도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뭔가 좋지 않은 상태임을 알리는 소리인 건 분명한데, 여전히 불도 잘 붙고 평소와 다를 건 없어 보였다. 무심코 며칠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불이 붙지 않았다. 그제야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점화할 때 사용하는 건전지가 닳았다는 신호라 한다. 가스쿡탑을 들어 올렸더니 안쪽에 커다란 배터리가 두 개 박혀있다.

가스 불을 오래 켜놓아 프라이팬이나 냄비가 과하게 달궈지면 가스레인지에서 삐빅 소리가 나면서 불이 저절로 꺼지곤 했다. 온도 등 여러 위험을 감지하고 점화까지 하느라 배터리를 다 사용한 모양이다. 하지만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배터리 여분이 집에 있을 리 없었다. 밥은 전기밥솥에 하고, 끓이는 음식은 해먹지 않았다. 그래도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 덕분에 그럭저럭 세 끼를 버텼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80년대엔 집에서 연탄을 땠다. 연탄불로 방을 데우고 음식도 했다. 난방을 하지 않는 여름엔 ‘곤로’라고 부르던 석유풍로를 사용했다. 석유풍로도 없던 시절엔 여름에 어떻게 음식을 해먹었을까 궁금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엌문 바깥에, 바로 입구에 부뚜막이 또 있었어. 방안으로 열기 안 들어오는 아궁이. 그래야 여름에 음식을 하지.”

아, 그랬구나. 조리하는 곳이 부엌 바깥이라니 불편했을 것 같다.

“부엌이 넓은 집은 굴뚝만 밖으로 빼고 부뚜막을 부엌 한쪽에 따로 만들기도 했어. 그런데 어느 집이나 부엌이 좁아서 밖에다 해놓는 집이 많았지.”

이왕 묻는 김에,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음식 하는 과정도 들어보기로 했다.

“밥할 때는 장작을 넣어서 불을 지피지. 밥이 부르르 좀 끓을 정도로만 나무를 넣어. 너무 끓으면 밥물이 넘치잖아. 아침저녁으로 밥을 하니까 나무를 얼마나 넣어야하는지 느낌으로 알지. 밥이 끓으면 불이 없는 상태로 한 10분, 15분 정도 그대로 둬. 솥이 약간 식었을 때 아궁이에 솔가루(솔잎이 땅에 떨어진 것)나 나뭇잎을 좀 넣고 다시 불을 때지. 그러면 솥이 뜨거워지면서 뜸이 드는 거야.”

“여름에도 아침저녁으로 밥을 했어? 더운데, 하루에 한 번만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러게. (잠시 생각하다가) 아마 여름엔 밥이 잘 쉬니까 한 번에 밥을 많이 안 했던 것 같아. 아침에 한 밥을 점심까지 먹고 저녁엔 해먹었어. 겨울에는 또 밥이 얼잖아. 부엌이 여름엔 덥고 겨울엔 또 무지 추웠어. 그래서 그때그때 해먹은 거지. 여름에 불 때서 밥하려면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몰라. 그땐 당연한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참 고생하고 살았구나 싶어.”

불 조절 쉽지 않았던 연탄

아궁이에 불을 때서 조리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기사를 과거 신문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아궁이는 대체로 화재 사고에나 등장했다. 다행히 1977년 한 기사에 옛 모습이 담긴 글이 실렸다.

‘삼복더위에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느라 비지땀을 흘리던 아낙네의 딱한 모습, 끼니마다 밥이 설익을세라 뜸이 덜 들세라 온 신경과 정성을 다하던 그 모습이 변해간다.’(1977.7.7. 경향)

하루에도 몇 번씩 밥을 하고 농번기엔 새참까지 만드느라 여성들은 거의 온종일 부엌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에서 매 끼니를 차려 식구들 앞에 꼬박꼬박 대령했다. 그 행위가 당시 신문을 만든 식자층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은, 언급할 필요없는, 당연한 일로 보였던 모양이다. 기층을 이룬 여성 대다수가 무수히 밥을 짓는 동안, 그 밥을 먹은 이들은 눈앞에 빤히 보이는 비지땀과 빨갛게 언 손은 잊은 채, 화재 사고와 ‘추억의 맛’으로만 아궁이를 기억할 뿐이었다.

1960년대 들어 연탄이 보급되면서 더는 장작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연탄은 빨리 불이 붙지않는 특징이 있었다. 엄마는 연탄에 적응해가던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열다섯 살쯤 됐을 때 처음 연탄불을 썼는데, 너무 답답했어. 불이 확 올라오면 음식 하기가 편한데, 금방 연탄 갈았을 때는 불이 올라오려면 한참 걸리니까. 장작은 나뭇가지나 나뭇잎 넣으면 금방 활활 타는데, 연탄은 불 조절이 쉽지 않더라고.”

이런 어려움은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1962년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아침에 부엌에 내려가서 아궁이를 열었을 때 불이 아물아물한다면 얼마나 당황할 일인가. 애들과 남편을 시간 맞추어 보내야하는데 그 불로는 도저히 밥을 해낼 자신은 없고 더구나 얹을 숯도 없을 때는 막막하다. 갈아 넣었다가 불꽃이 오른 다음에 하면야 그만이겠으나 그러자면 모두 애매하게 한 끼를 걸러야한다.’

난감한 상황에서 필자가 제안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가물가물한 연탄을 집어내고 다음 아래에 깔린 완전히 연소된 재도 끄집어낸다. 이 둘을 반대로 다시 아궁이에 넣는다. 즉 불 있는 것을 아래로, 싸늘한 재를 위로 가게 한다. 아궁이 밑은 모두 열고 한 3분가량 있으면 신기하게도 다 탄 연탄에서 푸른 불꽃이 오른다. 밥은 물론 두세 시간은 그냥 무엇이나 할 수 있다.’(1962.3.7.동아일보)

난방과 취사의 완벽한 분리

1960년대 석유풍로가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석유풍로는 장작불을 지피거나 연탄 화력이 세어지길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연료통에 석유를 넣고 심지에 성냥불을 붙이면 곧바로 적절한 화력으로 음식을 조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궁이도 필요 없었다. 석유풍로는 난방과 취사를 완벽하게 분리한, 혁신적인 물품이었다.

“곤로를, 나는 다른 집보다 좀 늦게 썼어. 너 낳고 썼으니까 1978년쯤 될 거야. 비쌌거든. 석유도 그렇고. 근데 연탄불 쓰다가 풍로 쓰면 되게 편했어. 물론 여름엔 그거 하나로 국도 끓이고 반찬도 만들어야 하니까 밥 차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장작이 화재 사고를, 연탄이 연탄가스 사고를 많이 냈다면 석유풍로는 폭발 사고가 종종 일어났다. 1967년 12월 ‘부엌에서 석유풍로로 밥 짓다 석유풍로가 과열되어 폭발, 불길이 옷에 인화되어 전신에 중화상’(동아일보)을 입은 이가 병원에서 숨졌고, 1978년 2월엔 한 초등학생이 ‘석유풍로에 휘발유를 부어 넣고 불을 붙이다 풍로가 폭발’(경향신문)해 불이 나 숨졌다. 1983년 서울YMCA 소비자고발센터가 조사해보니 ‘시판되는 석유풍로의 80% 이상이 상태가 불량하거나 사용하기 불편’했다.

‘대부분의 제품이 유량계의 표시가 불량하고 연소 때 일산화탄소 비율이 기준치를 넘어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조사 대상 풍로 가운데 반 이상이 소화시간이 기준치보다 길었고 연소 때에는 냄비에 그을음 현상이 일어났다.’(1983.5.10. 경향신문)

이 무렵 도시에서는 가스레인지가 고급 주방기기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가스레인지는 1970년대 초부터 일본, 미국,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것을 일부 가정에서 사용하다가 1974년 금성사에서 가스레인지를 대량 생산하며 국내 제품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스레인지와 연료 값이 비싸고 가스 폭발 위험 때문에 사용하기를 주저하는 이가 많았다. 가스레인지가 대중화된 것은 1980년대였다.

“가스레인지는 폭발한다는 말이 많아서 무서워서 안샀어. 우리 집엔 1988년에 들여놨는데, 아주 깐깐하기로 소문난 친구가 너무 편하고 좋다며 사라는 거야. 동네에서 가스레인지 없는 집이 없었어. 가스레인지 딱 들여놨는데, 세상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불을 켰는데 냄새도 안 나고. 그것만 좋은 게 아니야. 연탄이든 곤로든, 냄비를 올려놓으면 불 닿는 밑바닥이 새카매져. 그을음이 엄청나게 묻거든. 그거 닦느라 되게 힘들었거든. 안 닦는 집도 많았는데 나는 지저분한 게 싫어서 양은솥을 아주 반들반들하게 닦았지. 근데 가스레인지는 그게 없는 거야. 음식도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잖아. 요리하는 시간, 설거지 시간이 반은 줄어든 것 같더라고.”

가스레인지에서 인덕션으로, 그러나

가스레인지 생산업체들은 가스레인지에 그릴을 장착하거나 화구를 세 개로 늘리는 등 고급화 전략을 내세워 소비자들이 가스레인지를 새 것으로 교체하게 부추겼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전기레인지와 자기력을 응용한 인덕션이 소개됐으나 별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가스레인지에서 조리 시 유해 성분이 많이 나온다는 뉴스가 빈번하게 나오고, 미세먼지로 환기가 어려운 날이 늘어나면서 인덕션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스레인지를 대체할 취사도구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에 인덕션에서 사용 가능한 자력이 있는 냄비와 프라이팬도 덩달아 판매가 늘었다.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가 쓴 다음 글을 읽어보자.

‘80년대에 연탄가스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 환자는 여성이 남성의 거의 두 배였는데, 이는 결코 여성의 가사노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요리할 때 나오는 각종 연기가 폐암을 유발한다는 보고서가 얼마 전에도 나왔지만, 집에서 요리하다가 폐암에 걸려도 이는 산재도 아니고 직업병도 아니다. 엄마라는 이름은 유령 노동자니까.’(2017.3.7. 채널예스)

다른 이의 삼시세끼를 차리는 이는 노동자일까 아닐까 하는, 동어 반복의 의문이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석유풍로가 가스레인지로, 가스레인지가 인덕션으로 대체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도, 의미 있는 경력도, 노후 보장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을 다루는 주체가 할머니에서 엄마로, 아내로, 딸로 성별 대물림되며 모습만 바뀌었을 뿐, 그 무엇도 달라진 건 없다. 살기 위해선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식사, 그 책임을 가정의 테두리 안에 가두는 장벽을 허물순 없을까. 그러니까 집 안의 가스레인지와 인덕션을 모조리 밖으로 끌어내 함께 요리하고 함께 먹을 순 없을까. 가스레인지와 도마 앞에 선 이들에겐 4대 보험과 급여를 지급하고, 동네 사람들은 누구든 함께 먹는 커다란 공동체 밥상. 모든 이에게 보기 좋고 평화로운 그림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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