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건물에서 삶을 배우다
[영화읽기] 건물에서 삶을 배우다
  • 이영주 시민기자
  • 승인 2019.08.19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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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이타미 준의 바다(The Sea Of Itami Jun)│정다운 감독│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건축가 이타미 준(1937~2011)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 국적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재일 한국인이다. 이타미 준은 건축가로서 사용한 이름이고, 본명은 유동룡이다. 성씨인 유(庾)가 일본에서는 쓰지않는 한자라 일본에서 본명으로 활동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한국에 갈 때 비행기를 탔던 이타미 공항의 이름과, 깊은 우정을 나눴던 한국인 작곡가 길옥윤의 마지막 글자 윤(일본어 발음 ‘준’)을 따서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초반에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건축가로서 제대로 활동하기도 어려웠으나 경계인, 디아스포라로서 철학이 담긴 이타미 준의 건축은 뒤늦게 두각을 나타냈다. 2003년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에서 건축가로서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고 2005년엔 프랑스 예술훈장 슈발리에와 레지옹도뇌를 훈장을 받았다. 이어서 2006년 한국의 김수근 건축상,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2010년 일본 최고의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수상했다.

정다운 감독의 ‘이타미 준의 바다’는 빼어난 건축가 이타미 준의 작품 연보를 따라가며 건축가 이타미 준의 삶과 건축가로서 철학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인간이 드러나는 따뜻한 건축, 자연 본래의 야성미가 존재하는 건축,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낡고 쇠퇴하면서도 새로운 것과 서로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추구했던 이타미 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건축물이 공들인 연출로 아름다운 화면이 돼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건축에 문외한인 관객이었지만 일본과 한국의 자연과 사람, 역사와 융합하는 건축물을 화면 가득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타미 준의 건축물은 자연과 어우러져 자연 자체가 예술작품이 되게 만드는 새로운 양식이었다.

무엇보다 영화는 그의 작품과 가족, 동료, 연구자들의 인터뷰로 일본사회에서 귀화를 거부하고 한국 국적으로 평생을 살았으나 한국에서조차 낯선 이방인으로 여겨진 이타미 준의 위치가 어떻게 건축이라는 예술로 표현됐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는 예술을 지향할 수 있었고, 평생을 다 바친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건축을 땅위에 불뚝 솟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자연과 관계의 맥락 안에 놓이는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 땅에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이의 삶과 융합한 집을 짓는 것이 제 꿈이고 철학입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타미 준의 공간 이미지는 어느새 국경과 시간을, 사람과 자연을 넘나들며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건축이란 본래 과거 그 공간에 살았던 사람의 역사와 지금 살고 있는 이들의 흔적, 앞으로 살 사람들을 이어주는 스토리텔링이었다는 걸, 이타미 준의 건축물은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래서 건축에 대해 예술에 대해 특별한 지식을 갖지 않은 나 같은 관객조차도 영화를 보며 이타미 준의 작품에 뭉클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유동룡이자 이타미 준. 재일 한국인, 이민자, 경계인의 위치가 이타미 준 개인에게는 큰 고통이자 평생 첨예한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치열하게 고민한 예술가가 내놓은 작품은, 우리에게 사람과 자연,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걸, 인간의 정체성이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자연과 관계, 시간의 맥락 안에 놓여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한다. 건물에서도 삶을 배울 수도 있구나!

영화를 보고 난 뒤 제주에 가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제주여행을 했으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포도호텔ㆍ돌미술관ㆍ바람미술관ㆍ물미술관을, 자연 자체가 예술작품이 되는 건축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 이영주는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이며, 평소 드로잉을 많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