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10)
[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10)
  • 인천투데이
  • 승인 2019.08.1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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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청년, 평양 하늘에 항일의 기개를 드리우다
우종식과 이억근

[인천투데이] 19세와 18세인 인천 청년 두 명이 1932년 11월 30일 전후에 학업을 위해 머문 평양에서 경기도 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됐다. 같은 날 경찰서에서, 형무소에서 찍은 사진을 남긴 이 둘은 우종식(禹鍾植)과 이억근(李億根)이다.

우종식(1932.12.14. / 1933.1.15. 촬영)
우종식(1932.12.14. / 1933.1.15. 촬영)
이억근(1932.12.14. / 1933.1.15. / 1936.7.9. 촬영)
이억근(1932.12.14. / 1933.1.15. / 1936.7.9. 촬영)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에 1913년 1월 5일 출생으로 기재한 우종식의 본적과 출생지는 인천부 화정(花町) 1정목(丁目) 91번지이고, 주소는 평양사범학교기숙사이다.

1914년 7월 생으로 카드가 모두 세 장 있는 이억근의 주소는 체포와 수감을 반복하면서 생긴 시간차 때문에 평양사범학교 기숙사, 인천부 율목리(栗木里) 93번지, 현재의 숭의동 일대인 부천군 다주면(多朱面) 장의리(長意里) 379번지로 돼있다.

이 두 명은 평양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며 동향 출신의 우애를 나눴으리라. 중학교 이상 진학률이 높지 않았던 시대에 인천도 아닌 평양에서 서로 몰랐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체포된 이유인 평양사범학교 내 독서회 구성 역시 서로 믿으면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예심은 1년 이상 걸렸는데, 독서회가 평양조선공산청년회 결성으로 연결돼 1934년 12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우종식)과 징역 1년 6월(이억근)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에는 우종식이 학생으로 기재된 반면, 한 살 어린 이억근은 노동이라 했다. 이억근은 평양사범학교를 중도에 자퇴하거나 퇴학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32년 4월 30일 조봉암이 활동했던 상해파 공산주의그룹의 구성원이던 김기양(金基陽)으로부터 5.1 메이데이 기념 격문 등을 살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경성과 인천에 뿌린 뒤 7월께 우종식을 만나 평양사범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서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억근이라는 이름은 1932년에 인천에서 벌어진 메이데이 격문 사건에도 나온다. 관련 경찰문서에 따르면, 안문식의 권유를 받은 정갑용이 안경복, 이억근, 최덕룡, 신수복 등과 1932년 3월 어느 날 인천부 외리의 신수복 집에 모여 국제적색구원회(Mopr, モツプル)라는 조직을 만들기로 했는데, 이때 이억근은 안경복과 함께 교양부를 맡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우종식이 석방된 뒤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다만 인천체육회가 주최하고 <매일신보> 인천지국이 후원해 1937년 1월 31일 송림동 도축장 건너편 ‘링크’에서 열린 인천빙상대회에서 남자 1500미터에 3분 38초 4로 2위에 입상한 인물로 우종식이 나온다. 1913년생이므로 1937년 당시 25세로서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억근은 항일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36년 8월 12일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1936년 10월 13일 출소했다.

<매일신보> 1936년 7월 2일 기사에 따르면, 공산주의 서적을 읽고 주변에 전파했으며 1934년 9월 인천에 있는 조선염업주식회사(朝鮮鹽業株式會社) 인부들의 임금인상 요구 동맹파업을 선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감옥에 있든, 밖에 있든 동지들과 연계해 활동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이억근과 우종식 체포를 전하는 '매일신보' 1932.12.4
이억근과 우종식 체포를 전하는 '매일신보' 1932.12.4

한동안 사라졌던 이억근의 행적은 해방 뒤 ‘반민특위’ 조사과정에서 나타난다. 1949년 4월 27일 유동 23번지에 사는 이억근이 반민특위 인천조사부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여기서 이억근은 일제 경찰 전정윤(全正允)에 대해 “약 40일간 유치를 당하고 전정윤, 권오연, 송이원 3인에게 비행 고문, 물먹이 고문을 당하다 송국되어 결국 6개월 언도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며 “그 당시 전정윤, 권오연, 송이원은 인천 청년이 가리켜 ‘세 마리의 까마귀’라고까지 불렀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아울러 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한 증인신문에 스스로 나서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소생은 지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상당한 고통을 당한 것은 사실이고 심지어는 소생의 부친까지 영향이 미쳐 그 당시 소생의 집은 파산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오늘날 신생국가 수립과 동시 그들 자신이 자진 죄과를 자백할 것을 충심 바라는 나머지 금일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광복절을 앞둔 거리 곳곳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그런데 이 인천 거리 곳곳을 항일의 유인물을 안고 누볐던 젊은 얼굴들을 마주 대하는 것이 편치만은 않다. 만약 이억근이, 우종식이 ‘내 고향 인천은 인천의 항일투사들을 기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부끄럽게도 대답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