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천영기의 인천달빛기행
7. 인천도호부와 인천향교 (하)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향교 입구. 홍살문 왼쪽에 하마비가 있고 홍살문 너머로 외삼문이 보인다.

향교의 기원과 기능

향교를 국가가 지방에 설립해 운영한 학교로 본다면 향교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8년 간행한 우리나라의 각종 제도와 문물에 관한 기록을 모은 책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건립된 최초의 향학은 서경의 학원(學院)이며, 그 뒤 1003년(목종 6)까지는 최소한 3경 10목에 향학이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1127년(인종 5)에 여러 주에 학교를 세우게 조서를 내렸고 각 군현에 학교가 설립된 여러 사례가 나타남을 감안할 때 이 시기를 향교의 성립기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고려의 모든 시기를 본다면 향교 교육의 실태는 군현제 강화와 함께 실시되는 조선시대 향교제도와 비교할 수 없는 저조한 수준이었다. 결국 향교는 조선왕조 성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그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ㆍ강화했다. 오늘날 국ㆍ공립 중ㆍ고등학교와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교궁(校宮)ㆍ재궁(齋宮)ㆍ학궁(學宮)이라고도 불렸다.

향교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제향(祭享) 기능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보면 ‘郡縣之祀 三壇一廟(군현지사 삼단일묘)’라 하여 ‘군현에서는 삼단과 일묘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삼단은 사직단(社稷壇)ㆍ여단(?壇)ㆍ성황단(城隍壇)을 말한다. 일묘는 문묘(文廟)를 일컫는 것으로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칭이다. 문선왕은 공자를 일컫는 말로, 결국 문묘란 공자를 모신 대성전과 동ㆍ서무를 포함한 영역을 의미한다. 석전대제는 향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다.

두 번째, 교육 기능이다. 조선시대에는 향교 설치로 유학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국가는 모든 향교에 유학을 교수하는 교관을 파견했다. 교관은 유학에 소양이 있는 지식인으로 선임하고 수령과 함께 파견되게 법제화했다.

세 번째, 풍속 교화 기능이다. 향교는 지방의 풍속을 바로잡고 각종 의례 보급과 전파 등으로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지역사회 교화에 많은 역할을 했다.

인천향교 외삼문.

인천향교의 역사

인천향교 창건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천향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최항의 「인천향교기」(1464)에 제10대 인주(仁州) 지주사(知州事)였던 신개가 1406년(태종 6) 대성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볼 때 1406년 이전에 현 위치에 인천향교가 지어진 것은 분명하다. 다만, 구전에 의해 인천향교가 설립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후 인천향교는 1466년(세조 12)과 1501년(연산군 7) 또는 1502년에 중수됐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향교 건물이 불에 타 1701년(숙종 27)에 다시 중건됐다. 그 뒤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1914년에 지금의 문학동 일대가 경기도 부천군으로 편제되면서 인천향교의 명칭은 부천향교로 바뀌었다. 당시 인천부와 부평부를 통합해 부천군을 신설했기 때문에 부천군 관내에는 부평향교와 부천향교가 존재하게 됐다. 결국 부천향교 존폐 문제가 대두됐고 1941년에 문을 닫았다.

해방 이후 인천향교 복구 문제가 대두돼 1946년 3월 인천향교 복구기성회가 조직됐고 1948년에 부평향교로부터 분리돼 인천향교로 복원됐다. 그 이후 건물에 문제가 생기면 중수와 수리를 거듭하고 있고 단청도 새로 칠해 인천향교는 말끔하게 새 단장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맞이한다. 1990년에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1호로 등록됐다.

인천향교의 공간구조

향교는 공자 이하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와 학생들을 모아 강습하는 학교가 병설돼있으며, 그 기능에 따라서 필요한 건물들이 강학공간(講學空間)과 배향공간(配享空間)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향교의 건물 배치는 평지의 경우 전면이 배향공간이고 후면이 강학공간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이다. 구릉지인 경우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이거나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기도 했다. 인천향교는 구릉지에 축대를 쌓아 건물을 배치했기에 전학후묘 방식을 취했다.

하마비ㆍ홍전문과 외삼문

인천향교 입구에 하마비와 홍전문이 세워져 있다. 하마비(下馬碑)는 조선시대 종묘와 문묘, 궐문 앞에 세워놓은 석비를 지칭하는 용어다. 인천향교에 세워진 하마비에는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 :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만큼 향교를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다.

홍전문(紅箭門)은 능ㆍ원ㆍ묘ㆍ궁전ㆍ관아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운 붉은 칠을 한 문으로 홍살문이라고 한다. 그 형태를 보면 나무로 만든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없이 붉은 살(紅箭)을 박아놓았는데, 그 가운데에 태극무늬를 새겼다. 태극무늬를 지나는 홍살들은 서로 꼬여있어 삼지창 모습을 하고 있다. 붉은 문은 귀신과 액운을 물리친다는 풍속적 의미를 담고 있다.

홍전문을 지나 50m가량 올라가면 외삼문(外三門)이 좌우 담장을 두르고 서 있다. 외삼문은 신삼문(神三門)이라고도 하는데 문을 세 칸으로 나눠 출입구를 셋으로 만든 데서 비롯한 말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이며, 엄격히 따진다면 중앙 솟을대문은 신문이고 양쪽 문은 인문(人門)이다. 신문은 항상 닫아 두는 것이 상례이며, 인문은 열어둬 일반 참배객의 내왕을 허용하고 있다. 중앙의 신문은 춘추 제향이나 삭망(朔望) 때 열어서 헌관(獻官)만 출입하게 하고, 일반 제관은 동입서출(東入西出) 즉 동문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나온다.

동재ㆍ서재 너머로 보이는 대성전과 동무ㆍ서무.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재ㆍ서재

외삼문을 들어서면 6m 정도의 높은 축대와 가파른 계단이 바로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 순간 ‘어떻게 이렇게 여유 공간 없이 건물을 지었지’라는 생각을 한다. 계단을 오르면 왼쪽은 명륜당(明倫堂)이고 오른쪽은 향교 제사와 관련한 제기와 의복 등을 보관하는 재실(齋室)이며 대문이 같이 붙어있다.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뒤를 돌아보기 바란다. 향교에서 바라보는 가장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어쩌면 이런 극적 효과를 위해 축대를 높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길마산ㆍ수리봉ㆍ문학산ㆍ연경산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향교 관리 등의 업무를 보는 사람이 기거하는 수복청이 있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명륜당 마당이 나온다. 명륜당은 강학하는 공간으로 교육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편(?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이 글을 배우고 익힌다.

건축양식을 보면 외벌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과 막돌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을 올렸으며 초익공에 겹처마를 낸 굴도리집이다. 이 건물의 출입은 뒤쪽으로 이뤄지며 정면의 중앙 3칸에는 판문(板門)으로 된 창호가 달려있다.

인천향교에 가면 명륜당에 들어가 창호를 열어놓고 앉아보기를 권한다. 앉아서 문학산 산세를 보고 있자면 앞이 툭 트인 것 같아 시원스런 것이 글을 읽고 사색하기에는 최적지임을 알 수 있다.

명륜당 마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동재(東齋), 왼쪽으로는 서재(西齋)가 대칭으로 위치해있는데 동재에는 양반의 자제가, 서재에는 양민의 자제가 기숙했다. 건축양식을 보면 정면 4칸 측면 2칸이나, 측면의 앞 1칸은 툇마루로 구성돼있다. 다만 내부 구조를 보면 동재는 우측 1칸이 부엌이고 모든 방이 온돌로 돼있으나, 서재는 좌측 1칸만 온돌방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두 건물 모두 방형초석에 사모기둥을 올렸고 포작은 생략했으며, 홑처마에 맞배지붕 납도리집이다. 1983년에 퇴락한 동ㆍ서무와 함께 동ㆍ서재도 완전히 철거하고 옛 모습 그대로 새로 지어 깔끔하게 보인다.

대성전 내부.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동무ㆍ서무

강학공간과 배향공간은 원래 내삼문으로 나뉘어있었다. 1985년에 이를 철거하고 계단을 설치했다.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서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원래 대성전은 공자와 4성(四聖,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 중국의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인), 송조육현의 위패를 모셨는데, 1949년 전국유림대표회의에서 모화사상을 축소하자며 공문십철과 송조육현의 위패를 땅에 묻자고 결의했다. 인천향교에서는 1975년에 이를 묻고 동ㆍ서무에 봉안하고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대성전으로 모셨다.

대성전에서 향교의 가장 큰 행사인 석전대제(釋奠大祭)가 열린다. 석전대제는 문묘에서 매해 두 차례 공자를 비롯해 위패가 봉안된 유현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원래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올렸으나 2007년부터 양력으로 환산해 공자가 돌아가신 날인 5월 11일에 춘기석전(春期釋奠)을, 탄신일인 9월 28일에 추기석전(秋期釋奠)을 봉행한다.

대성전의 건축양식을 보면 2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옆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측면의 앞 1칸은 제향의 기능을 고려해 퇴칸으로 구성했는데 퇴칸의 주춧돌은 원형초석, 나머지는 막돌초석을 사용했다.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이며 포작의 정면은 이익공, 후면은 초익공이다. 처마도 정면은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를 사용해 건물 뒤는 공력을 줄인 것을 알 수 있다.

동무(東?)와 서무(西?)는 대성전 앞에 있는 건물로 공문72현과 한당2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셨다. 인천향교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만 모셨는데 1975년 대성전으로 옮겼고 제기들을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현재는 향교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설명판을 부착해 관람하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동ㆍ서무는 건물 규모나 형태가 모두 같다. 건축양식을 보면 2벌대의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민도리집이다. 주춧돌은 방형초석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사모기둥을 올렸다. 포작은 생략했으며 홑처마에 맞배지붕으로 옆에 날렵한 방풍판을 달았다.

※ 천영기 시민기자는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달빛기행’을 하고 있다.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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