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인천투데이] 역사는 역설의 연속이다. 조선 도공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일본 가고시마 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정한론의 거점이었다. 조선 정벌을 주장하다가 정계에서 밀려난 사이고 다카모리가 가고시마, 즉 명치유신 이전의 사쓰마 번 출신이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 중 일부가 사쓰마 번에 정착했고, 고국의 풍습을 잃지 않고 버티며 후손들을 번창시켰다. 그리고 훗날, 이곳에 옥산신사가 건설됐다. 신사라고 부르지만, 단군을 신으로 모신 단군사당이다. 일본 내에서 조선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해온 지역에서 ‘조선을 토벌하자’는 목소리가 꿈틀대며 나온 것은 의아함을 넘어 슬픈 현실로 남아 있다.

사쓰마 번과 인접한 조슈 번은 지금의 야마구치 현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지역구이기도 한 이곳은 소위 ‘정한론의 고향’이다.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요시다 쇼인이 여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정한론과 명치유신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다. 이노우에 카오루, 이토오 히로부미 등 명치유신의 주역들 중 상당수가 요시다의 제자다.

권력을 장악한 이노우에 등은 조선에 눈길을 돌렸다. 마침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해 정부가 갈팡질팡하고 있던 때였다. 조선 정부는 청군에 병력을 요청했고, 일본군도 제물포에 상륙해 주둔했다. 나라가 외세에 짓밟힐 것을 우려한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을 맺고 한발 물러났지만, 일본군은 거듭된 조선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제물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은 서울로 진격해 경복궁을 점령했다. 1894년 7월 23일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다. 지난 7월 23일, 북한 <로동신문>이 125년 전 일본군의 ‘조선왕궁습격’을 거론하며 일본의 경제 보복을 비난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고 조금 의아했다. 경복궁 점령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 잘 거론되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그것을 콕 집어 일본을 겨냥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곧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고종을 압박해 내정개혁을 진행하게 했다. 일본인 고문관들이 각 관청에 배치돼 무수히 많은 개혁안을 발표하게 했다. 우리가 알고있는 갑오개혁이다. 경복궁 점령 사건은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이후 이어진 동학농민군 토벌의 단초가 됐다. 이때 일본군을 이끌던 이가 여단장 오오시마 요시마사였다. 아베 총리의 고조부로 알려진 인물로, 역시 조슈 번 출신이다.

일본이 조선 침략을 강행하고 있을 때, 영국 등 서양 제국들은 청국과 일본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었다. 자국의 이익을 포기한 채 조선을 도울 나라는 없었다. 조선은 그걸 간과했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우방은 없다. 동맹은 전쟁을 대비한 군사적 조치일 뿐, 국익에 해가 된다면 국가 간 협력관계는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다. 120여 년 전의 조선은 두려움이 많았다. 처음에는 일본이, 그리고 미국이, 혹은 러시아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은 모두 등을 돌렸다. 스스로 개척해갈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권력자들은 쉬운 길을 택했다. 그 길을 막고자했던 이들이 동학농민군과 같은 백성들이었다.

자주성이 탄탄하지 못한 국가는 필연적으로 외세의 개입을 초래한다. 국가 역량을 키워 탄탄한 국가체제를 만드는 일은 국민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부터 시작해야한다.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미국에 구걸하지 않아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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