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 100주년 광복절 초대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죽산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정부가 3ㆍ1운동 100주년과 광복절 74주년을 기념해 지난 13일 발표한 독립운동 유공자 명단에 죽산 조봉암은 초대받지 못했다.

올해는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되는 해이자, 독립운동과 건국에 헌신한 죽산이 태어난 지 120년 되고 서거한 지 60년 되는 해라 기대감이 컸던 터라 실망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죽산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이제 서훈 신청은 죽산에 대한 모독이라며 더 이상 신청을 안 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지난해 서훈 신청도 정부가 자체적으로 검토했다가 보류한 것인데,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더 이상 정부에게 미련이 없다고 했다.

국가보훈처가 서훈 신청을 꺼리는 이유는 ‘죽산이 일제와 타협했다’는 논란이다. 일제와 타협 논란의 근거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1940년 1월 실린 광고와 이듬해 12월 실린 한 줄 짜리 단신 기사이다.

우선 1940년 1월 5일 <매일신보>에 흥아신춘(興亞新春)이라는 제목과 함께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광고가 실렸고, 이듬해 12월 23일자 신문엔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휼병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가 실렸다.

흥아신천은 일본이 꿈꾸던 ‘대동아공영 아시아의 부흥’ 뜻을 내포하고 있고, 휼병금은 전장에 나가 있는 일본군 위로금을 뜻이니, 국가보훈처는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자료제출을 유족에게 요구했고, 유족은 더이상 제출할 게 없다며 서훈 신청을 접었다.

죽산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물론 연구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광고와 단신 기사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며, 일제 조작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제가 당대 거물인 죽산을 활용하기 위해 꾸며낸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죽산 조봉암 서거 60주기 추모제

우선 성관사라는 업체는 당시 제작한 인천상공인명록과 통계연보에 없다. 국립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931년 펴낸 한글판 인천상공인명록과 1936년 펴낸 일본어판 인천상공인명록에 성관사는 기업도, 조봉암이라는 이름도 없다.

죽산은 1933년 체포돼 1939년 출소 후 인천에 정착했다. 1936년에는 없더라도 1939년 출소 후 차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마저도 가능성은 희박하다. 1939년 일제는 인천상업회의소 통계연보를 발간했는데 여기에도 성관사와 조봉암은 없다.

인천대학교 양준호 교수가 일제강점기 일제가 발간한 인천상공인명록(1936), 인천상업회의소 통계연보(1939), 인천상업회의소 월보(1936~1941) 등의 자료와 인천상공회의소 50년사(1934)와 100년사(1986) 등의 자료를 모아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해 2009년 발간한 ‘식민지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인천학연구원)’에도 성관사와 조봉암은 등장하지 않는다.

양준호 교수는 “일제강점기 인천의 업종별 산업을 분류하고 기업과 기업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 위해 국립 중앙도서관과 인천상공회의소, 대학 등에서 자료를 구해 발간했는데, 성관사라는 이름도 조봉암도 없었다. 죽산 이름이 있었다면 금방 알아 차렸을 것이다”고 말했다.

조봉암 평전(한길사)을 쓰기 위해 인천상공인명록을 뒤졌던 소설가 이원규 선생 또한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다. 흥아신춘 광고는 일제의 요구에 기업들이 반강제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조봉암 이름이 실린 것은 그를 옭아매려는 일제의 공작이었는데, 지금도 죽산을 옭아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천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사는’ 죽산이 국방헌금 150원(현재 약 9000만 원 상당)을 냈다는 단신 기사도 신빙성이 의문이다. 당시 죽산의 주소는 소화정(현재 부평)이었고 실제로 부평에 살았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1941년 5월 15일 경기도 경찰부장의 기밀보고서에는 죽산이 부평에 사는 것으로 나온다. 이 보고서는 죽산이 옛 동지 김찬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기록한 기밀보고서로, 죽산이 소화정(현재 인천 부평동) 39번지에 살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조봉암 평전(한길사)에 실린 경기도 감찰부장의 기밀보고서.

헌금 150원도 유족은 당시 죽산이 그만한 성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원규 선생은 “평전을 쓰기 위해 유족을 숱하게 인터뷰했다. 죽산의 처남 김영순이 말하기를 당시 150원은커녕 10원도 낼 형편이 아니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죽산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일제가 1945년 1월 일제예비검속으로 죽산을 구속한 것만 보더라도 일제와 타협했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했다. 죽산은 예비검속으로 1월에 구속됐다가 8월에 풀려났다. 유족과 기념사업회는 “일제에 부역했다면 구속됐겠나. 우린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일갈했다.

이원규 선생 또한 “죽산이 진짜 친일을 했으면 일제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산은 헌금을 낼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오히려 8.15 해방 당시 죽산이 머물던 집에 수백여명이 모여 그를 연호하며 환호했다. 친일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며 타협 논란을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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