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1부)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거울 같은 강물 위에 숭어가 뛰노네’로 시작하는, 트윈폴리오가 부른 ‘숭어’는 슈베르트의 가곡 ‘송어’를 번안한 곡이다. 그렇다면 이 곡은 ‘숭어’일까, ‘송어’일까. 정답은 송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듯, 송어와 숭어는 점의 높낮이로 완전히 다른 종이 된다. 송어(trout)는 ‘연어과’로 산란 시기가 오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소하성 어류이고, 숭어(gray mullet)는 바닷물고기이기 때문에 거울 같은 강물에서 뛰어놀면 죽는다.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가 기록한 슈베르티아데 모습.{왼쪽} / 모리츠 빈 슈빈트가 그린 미하엘 포글과 슈베르트.

살리에리 제자로 작곡을 배우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1797-1828)는 오스트리아 빈의 외곽 리히텐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어 슈베르트’와 어머니 ‘엘리자베트 피츠’ 사이에서 아이 16명 중 13번째로 태어났으나 유아 사망률이 높던 때라 5명(2녀 3남)만 생존했고 그중 막내아들로 자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운영했는데, 우리나라 옛날 서당처럼 집에서 잠도 자고 생활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음악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 덕에 두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는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슈베르트도 아버지와 형들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가족 현악 4중주단이 형성됐다. 떡잎부터 달랐던 슈베르트는 7세에 음악에 재능 있는 어린이를 선발하는 오디션에서 뽑혔다. 이때 슈베르트를 발굴한 사람이 안토니오 살리에리다. 영화 ‘아마데우스’ 속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해 그의 숙적으로 나오는 그 살리에리 말이다. 당시 살리에리는 궁정 악장이었다.

1808년, 슈베르트는 11세에 음악 영재 소년들을 위한 슈타트콘빅트(Stadtkonvikt: 황실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 빈 궁정 예배당 소년합창단원이 된다. 이 합창단은 현존하는 빈 소년합창단의 전신이며, 하이든도 이곳 출신이다.

슈베르트는 이곳에서 살리에리와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벤젤 루지츠카로부터 음악교육을 체계적으로 받는다. 하지만 1812년에 변성기가 찾아와 합창단에 더 머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학교를 중퇴했지만, 특별한 재능을 인정받아 살리에리의 제자로 작곡을 배웠다.

13세부터 작곡을 시작해 5년간 교향곡 2개와 가곡 140개를 썼다. 보통 그를 ‘가곡의 왕’이라 일컫는데, 가곡의 왕뿐 아니라 다작의 왕이다. 곡을 얼마나 빨리 쓰는지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마왕’은 시를 보자마자 한 시간 만에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18세에.

또,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라는 곡은 술집에서 그 시를 읽자마자 메뉴판 뒷장에 오선지를 그리고 곡을 썼으며, 제대로 느낌 받은 날에는 하루에 곡 10개를 만들었다니, 알파고도 울고 갈 일이다. 그것도 습작이 아닌 ‘불후의 명곡’들로 말이다.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은 험난했다

그는 1814년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했다. 태생부터 자유로운 영혼인 그에게 한정된 공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맞지 않았다. 좋은 시를 읽고 영감을 받아 곡을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그러질 못하니 숨이 턱까지 막혔다. 결국 1816년에 라이바흐(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교원 양성기관 음악감독 자리에 지원하는데, 이때 살리에리가 추천서를 써줬지만 탈락하고 만다. 그해 가을, 슈베르트는 돌연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오로지 곡만 만들어서 먹고사는 프리랜서 작곡가가 됐다.

하지만 밑천 한 푼 없이 시작한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은 험난했다. 그는 평생 1000개가 넘는 곡을 만들면서 피아노 한 대 없이 오로지 책상에 앉아 곡을 썼다. 그가 죽기 1년 전에야 피아노를 샀다고 하니…. 그동안 그가 가진 건 낡은 기타 한 대였다. 하지만 그는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외려 이렇게 말했다. “기타는 무릎 위에 올린 교향악단이다.”

슈베르트의 친구인 작곡가 휘텐브레너의 기록에는 ‘그는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그리고 난방도 없는 작은 방에서 낡고 해진 잠옷을 걸치고 떨면서 작곡하고 있었다’라고 돼있다.

든든한 후원군 ‘슈베르티아데’

다행인 건, 친구 없이 외골수인 다른 많은 음악가와 달리 슈베르트는 기숙사 생활을 할 때부터 늘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이다. 슈베르티아데는 ‘슈베르트의 밤’이란 뜻으로 슈베르트의 음악을 좋아하고 후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그룹은 동년배에서부터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들까지 그 범위가 넓었다. 음악가, 화가, 문필가, 법률가, 철학가, 귀족 등 서로 관련없는 사람들이 오로지 슈베르트 곡을 좋아하는 것 하나로 뭉쳐 그의 곡을 알리고 후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친교모임이다.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가 그린 그림 속에서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슈베르트이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노래하는 사람은 미하엘 포글이다. 슈빈트는 슈베르티아데의 일원이며 슈베르트의 친구다. 1828년에 마지막 슈베르 티아데가 열린 곳도 이 친구의 집이었다.

이 모임의 일원인 휘텐브루너와 친구 몇몇이 슈베르트가 작곡한 ‘마왕’을 괴테에게 보냈다. 일단 곡에 자신이 있었고 괴테의 명성을 이용해 슈베르트를 알리고 싶은 계획이었지만, 당시 괴테의 흥미를 끌지 못한 건지, 아니면 괴테의 음악 자문인 젤터(Zelter)가 곡을 전달하지 않은 건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슈베르트가 죽고 나서야 괴테는 이 곡을 듣고 매우 감탄했다.

슈베르트는 계속해서 슈베르티아데를 통해 신곡을 발표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명곡들이 탄생했지만, 세상에 알릴 방도가 없던 차에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린 바리톤 미하엘 포글을 섭외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쉰 살이었던 포글은 주변에서 재능 있는 작곡가라고 소개해 여기저기 다니며 수없이 만나봤지만 번번이 실망했던터라, 슈베르트도 별 기대 없이 만났다.

21세 슈베르트는 덩치가 큰 이 거장 앞에서 기가 죽었다. 하지만 꿈에라도 한번 만나고 싶었던 거장을 앞에 두고 평생 다시 올지도 모를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반주했다. 그의 반주에 맞춰 포글은 노래 몇 곡을 부르더니 상투적인 칭찬을 몇 마디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사실 포글은 슈베르트의 곡에 압도당했다. 우물쭈물 사라진 건 아마도 그 앞에서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 포글은 슈베르티아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슈베르트의 열성 지지자가 돼 그의 곡을 알리는 데 누구보다 앞장선다. 슈베르트와 포글은 오스트리아 전역을 돌면서 공연했고 덕분에 그의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문학을 위한 반주를 예술의 경지로

여기서 잠깐, 포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슈베르트의 가곡은 도대체 뭐가 그리 특별한가? 슈베르트 이전의 가곡들은 유명한 ‘시’에 초점이 맞춰져있어, 피아노 반주는 그 시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었다. 코드 몇 개로 잔잔히 곡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말이다. 문학을 위한 음악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슈베르트는 반주에 스토리를 입혔다. 예를 들면 ‘마왕’의 경우, 말이 긴박하게 달리는 장면을 피아노가 묘사하고 있다. 듣고 있으면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당장 일어나 어디론가 뛰어가야 할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독일어를 몰라서 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곡만 들어도 뭔가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이는 때때로 연주자들에게 대단한 솜씨를 요하는 것으로, 연주자로선 곤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슈베르트는 일반적인 가곡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으며, 이것이 단순히 가곡을 많이 써서가 아닌 그가 진정 가곡의 왕인 이유다. 슈베르트는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작곡과 연주로 가수와 연주자의 혼연일체를 요구하는 새로운 예술형식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슈베르트는 생전에 가곡 633개를 만들었으며 이중 70여 개를 괴테의 시로 만들었다. 그밖에도 실러, 하이네, 셰익스피어, 단테 등 많은 문필가의 시를 이용해 곡을 만들었다.

슈베르트와 포글은 공연을 위해 포글의 고향인 슈타이어에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질베스터 파움가르트너(Silvester Paumgartner)를 만난다. 그는 광산업자이자 아마추어 첼리스트였다. 슈베르트의 가곡 ‘송어’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슈베르트에게 ‘송어’를 변주한 연주곡을 부탁했고, 그로 인해 명곡 ‘피아노 5중주 A장조’가 탄생했다.(다음에 계속)

※ 참고서적: 프란츠 슈베르트(한스ㆍ요아힘 힌리히센지음, 홍은정 옮김, 프란츠) /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이언 보스트리지 지음, 장호연 옮김, 바다 출판사) /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금난새 지음, 생각의 나무) / 음악가와 친구들(이덕희 지음, 가람기획) / 더 클래식(문학수 지음, 돌베개)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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