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엑시트(EXIT)│이상근 감독│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철봉을 잡은 팔뚝엔 굵은 힘줄이 툭 불거져 있다. 철봉에 매달려 균형을 잡는 품새가 예사롭지 않은 걸 보니 국가대표급 체조선수인가 싶었는데, 이게 웬걸! 철봉은 동네 놀이터 철봉이고 철봉에 매달린 용남(조정석)을 구경하는 관객은 마실 나온 할머니들뿐. 지나가던 초등학생들은 그런 용남을 보고 ‘동네 바보’라고 부른다.

집 밖에서는 하릴없이 철봉만 하는 바보 취급을, 집안에서는 나이 들어 늙은 부모에게 얹혀사는 빈대 취급을 받는 취준생 용남이 유일하게 남들보다 잘하는 게 있다면 대학시절 산악동아리 활동으로 얻은 클라이밍 실력. 그마저도 풀 수 있는 곳은 험준한 산령이 아니라 동네 놀이터 철봉이 전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지진과 태풍 등 재난 뉴스가 들려오는 세상이지만 용남에겐 인생 자체가 어떤 재해보다 더 심각한 재난이다.

어머니 칠순을 맞아 온가족이 참석하는 잔치에 참여한 용남은, 그곳에서 대학시절 동아리 후배이자 짝사랑 상대였던 의주(임윤아)를 만난다. 첫사랑을 만나 거짓말까지 보태며 허세도 떨고 칠순잔치 흥도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을 무렵, 의문의 연기가 구름정원 빌딩으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의문의 가스 유출사고. 가스를 접한 이들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이미 사상자도 나왔고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 상태. 점점 위로 올라오는 가스를 피해 의주와 용남, 용남의 가족과 친구들은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지만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 용남과 의주는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익힌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해 가족과 친구들을 대피시키고, 유독가스에 뒤덮인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고 벽을 타고 질주한다.

이상근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엑시트’는 유독가스 유출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탈출하는 과정을 담은 ‘재난영화’다. 그러나 여느 재난영화와는 다른 길을 간다.

데뷔 전 단편 작업에서 코믹에 강세를 보여 온 감독의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덕분일까? 재난이 닥쳤는데도 시종일관 경쾌하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용남과 의주에게선 재난영화의 영웅다운 비장함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살기 위한, 그래서 스크린으로 구경하는 처지에선 웃기기까지 한, 짠 내 폭발하는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대학 산악동아리에서 익힌 클라이밍 실력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빼어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안간힘이 빚는 페이소스가 긴장과 웃음 사이를 매끄럽게 줄타기한다.

언제부터인가 재난이 닥치면 ‘인재(人災)’라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천재처럼 보이는 일도 결국 인간의 실책으로 일어난 사고라는 의미다. 그래서 많은 재난영화는 재난 자체보다 재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재난에 대처하는 시스템의 실책을 고발하는 것이 이야기의 주된 얼개가 되곤 했다. 엑시트는 유독가스가 왜 유출됐는지, 가스 유출 이후 국가기관의 대책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얼핏 흘리듯 지나갈 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재난을 마주한 사람들, 그들의 고군분투에만 집중할 뿐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유독가스 앞에서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달리고 달리는 모습을 보며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남자가 주인공인 보통의 재난영화에서 여주인공은 주인공이기보다 장애물 역할을 주로 해왔다. 한마디로 민폐 캐릭터. 하지만 엑시트의 의주는 전혀 다르다. 대학시절에도 용남보다 클라이밍 실력이 훨씬 좋았고 현재의 재난상황에서도 빠른 판단력과 대처로 용남과 호흡을 맞춘다. 소녀시대 윤아의 긴 팔다리가 걸그룹 댄스에만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위기에 대처하는 의주의 유연하고 민첩한 몸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한국 재난영화에서 여성의 몸이 이토록 멋지게 재현될 수 있다니!

신파 없는 카타르시스, 세태를 깨알처럼 활용하면서도 전지적 시점에서 젠 체하지 않는 유머. 습식사우나 같은 이 여름의 무더위를 날려버리고 싶다면, 엑시트의 용남과 의주와 함께 ‘완등’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이영주는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이며, 평소 드로잉을 많이 한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