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충일, 항일의 일선에서 친일의 선두로

[인천투데이] 권충일(權忠一)이란 사람이 있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1905년 7월 16일생으로, ‘용의조선인 명부’에는 1907년 7월 22일생으로 나온다. 본적은 인천부 신화수리 196번지이고 출생지는 강화군이다.

권충일 사진1·2·3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권충일의 뒷면.

1934년에 인천의 노동조합 임원이었다. 일제 경찰문서에 따르면, 1931년에 적색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일환으로 정미직공 야체이카(세포조직)를 조직하고 책임자로 일했으며, 인천 청년 이홍순에게 모스크바 공산대학 입학을 권유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기도 했다.

1930년 3월 14일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1930년 3월 1일에 3ㆍ1절을 기념해 이승엽ㆍ김점권ㆍ이두옥 등이 실행한 격문 배포 사건 관계로 체포됐다. 이듬해 만보산 사건 영향으로 인천에서 발생한 조선인과 화교 간 충돌 사건으로도 체포됐다가 병으로 입원 중이던 인천부립 덕생원(德生院)에서 도망쳐 러시아로 탈출했다.

“아직까지 이러한 회합이 없었으니 만큼 여기에 대표로 참석하는 저희들의 책임의 중대함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상시국을 맞아 폐하의 적자로서 적성(赤誠 :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을 다하려고 하는 점만은 전국에서 모이는 대표들이 다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조선이라는 특수사정도 없지 않음으로 대회 석상에서 여러 가지로 협의를 하여 어떻게 하면 내선일체(內鮮一體)로 이 운동을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굳세게 진행시킬까 하는 점을 배워가지고 오겠습니다.”

1938년 6월 17일 <매일신보>에 실린,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시국대응 전국위원회(1938년 6월 20~22일)’에 조선 대표로 참가하는 권충일의 포부다. 인천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로 항일의 일선에 나섰던 권충일이 불과 5~6년 만에 내선일체를 적극 진행하자는 친일의 선두에 어떻게 서게 됐을까?

'매일신보' 1932년 5월 16일 기사

그 사이 권충일은 러시아에서 강원도 방면 노동운동을 위해 조선에 들어왔다가 1934년 말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1년여 동안 조사 등을 거쳐 1935년 12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출소일은 1937년 1월 28일이다. 이 수감생활이 권충일의 향방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사진1’은 1930년 11월 5일 일제 경찰이 복사한 권충일 사진으로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실려 있다. ‘사진2’는 1935년 수감됐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진으로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있으며, ‘사진3’은 전향 후인 1938년 6월 17일 <매일신보>에 실린 사진이다.

10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 자기 뜻을 온전히 지켜가기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제의 항일운동 탄압은 대대적이고 끈질기게 진행됐으며, 이 과정에서 자기 뜻을 굽힌 사람이 많이 나타났다. 이들을 모두 ‘친일’이라 낙인찍는 건,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이들의 지나친 인식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충일은 자기의 뜻을 꺾은 것에 그치지 않고 내선일체라는 일제의 방향에 맞춰 자기를 적극적으로 변화시켰다. 조선의 전향자를 대표해 도쿄에서 열린 전향자대회에 참석한 것은 물론, 시국에 대응한 조선 전체(全鮮) 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 결성에 앞장서 경성지부 간사를 맡았다.

이어서 1938년 겨울부터 1939년까지 영등포ㆍ양주ㆍ포천ㆍ개성ㆍ장단 등지를 다니며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방공(防共)강연회 연사로 활동했다. 바뀐 신념을 실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재판 기록을 보면, 권충일의 부친은 기독교 목사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 협성신학교를 다녔는데 부친의 권유인지 본인의 의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목회 활동을 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에는 중등교원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다니다가 중도 포기하고 1927년에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인천에 있는 노동조합 조합원과 청년동맹위원으로, 1929년 4월에는 신간회 인천지부에 가입해 간부로 활동했는데, 신간회 해체 후 공산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1930년부터 1934년 겨울에 체포되기까지 인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강원도 고성으로 거주지를 옮겨가며 노동운동가이자 항일투사로 살았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해방됐다. “혁신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우리는 일본의 승리를 위해서 몸을 버리겠다는 각오로 진력해야할 것입니다.”(삼천리 제11권 제1호, 1939)라고 했던 권충일은 해방을 맞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구처럼 ‘조선이 해방될 줄 몰랐다’라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자기 행위를 합리화했을까? 현실 법정에는 ‘정상 참작’이 있지만, 역사 법정에는 그게 없거나 작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한다는 속담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역사에서는 마지막 단추를 잘 꿰어야 죄인이 되지 않는 법이다. 권충일의 첫 단추는 시대의 지향과 맞았으나 마지막 단추는 시대의 지향을 거슬렀다. 결국 그는 ‘친일’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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