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천영기의 인천달빛기행
6. 인천도호부와 인천향교 (중)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아기장수 설화와 은행나무

아기장수 설화가 얽혀있는 은행나무.

문학초등학교 교정 뒤편에는 수령이 600년 훨씬 넘은 은행나무가 하늘을 떠받치는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는 도호부를 지을 때 풍치목(자연의 멋스러운 정취를 더하기 위해 심는 나무)으로 심어졌는데, 아기장수 설화가 얽혀 있다. 새 영웅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과 현실적 좌절, 비극적 결말로 마감하는 아기장수 설화는 국내 곳곳에 분포돼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이 사십이 돼도 아기가 없던 정 씨 부부는 산천에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점점 자라면서 이목구비가 번듯하고 피부가 백옥처럼 흰 귀공자로 바뀌어갔으며 몸집이 하도 커서 마을 사람들은 장래 대장감이 태어났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탁발승이 부인 등에 업힌 아이의 눈을 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춘 채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부인이 까닭을 묻자, 스님은 대답하기를 거절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이의 관상을 보니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은 틀림없지만 눈에 살기가 뻗쳐 많은 사람을 해치거나 역적이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마을에 나돌아 사람들은 재앙이 두려워 아이를 해칠 음모를 꾸미기도 하고 아이를 죽이라고 강요도 한다. 정 씨 부부는 궁리 끝에 산신령이 아이를 거두어줄는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아이를 산에다 버렸다. 아이를 버리고 돌아서자 갑자기 서쪽 하늘에 번개가 치고 천지를 흔들만한 굉음이 들렸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됐고 어느 날 석양이 물들 무렵 갑자기 아이를 버린 그 자리에서 용마가 솟아나 세 번 크게 울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은행나무 싹이 나와 무럭무럭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정 씨의 아들이 은행나무로 살아난 것이라 믿고 봄가을에 날을 가려 제사를 지내면서 마을에 평온과 풍년이 들기를 정성껏 기원했다. 마을 사람들의 정성에 감복했는지 은행나무는 잎이 하룻밤 새에 떨어지면 이듬해 풍년이 들고 잎이 떨어지는 기간이 길면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흉년이 드는 것을 미리 알려줬다. 또, 잎이 맨 윗가지부터 떨어지는 해에는 높은 지대 논에서부터 모를 심고, 맨 아래 가지부터 떨어지는 해는 낮은 논에서부터 모를 심으면 풍년이 드는 것을 알려줬다.’

이 나무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얽혀 있는데, 경술국치에 관한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기 3년 전부터 이 은행나무 주위에 구렁이가 몰려들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그 많던 구렁이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나라를 빼앗길 전조였던 것으로 깨닫고 이 나무를 더욱 신성하게 여겼으며, 개인의 소원성취를 위해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사라진 느티나무

문학초교 운동장에 인천도호부 풍치목으로 심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멋진 느티나무가 있었다. 문학산을 배경으로 바라보면 부드럽게 굽이치며 하늘로 뻗은 우람한 줄기가 마치 용이 몸을 틀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운동장 3분의 1지점쯤에 버티고 서있기에 축구장이 작아져 한쪽 골대를 느티나무 앞에 세웠다. 지금 이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육상경기트랙이 자리하고 있다.

여름에는 학생들이 나무 그늘 아래서 쉬며 놀기도 했는데, 1996년에 가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중에 그 학교 교사에게 들으니 벼락을 맞아 굵은 줄기가 부러져 뽑아버렸다고 했다. 문학초교에서 적어놓은 일지를 보니 ‘1995년 8월 26일 보호수 느티나무 태풍으로 폐사’라고 적혀있다. 그 태풍이 바로 재니스다. 중부지역에 내린 많은 비로 50여 명이 사망하고 이재민 1만여 명이 발생했으며, 재산피해 4563억 원이 발생한 초대형 태풍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사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수백 년간 문학산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켜온 이 멋진 나무가 하루아침에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다시는 그 멋진 자태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그나마 1990년대 초반에 사진을 찍어 스캔해놓은 것이 내 컴퓨터에 저장돼있어 그것으로나마 위안을 삼을 수밖에.

1990년대 초반에 촬영한 문학초등학교 운동장 느티나무. 1995년 8월 태풍 재니스가 상륙했을 때 굵은 줄기가 부러져 뽑아버렸다고 한다.

인천향교 앞 비석군

문학초교를 나와 문학경기장 쪽으로 400여m 가면 인천도호부 관아 주차장이 있고 그 옆 향교 앞에 인천부사 선정비 18기가 있다. 선정비(善政碑)란 지방 수령이나 관리가 백성을 아끼고 지역 발전에 공이 지대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나 떠난 후, 이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공적과 인품을 새겨 기린 비석을 일컫는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송덕비(頌德碑),청덕비(淸德碑),공덕비(功德碑),애민비(愛民碑) 등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선정비는 보통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관아 근처 길목이나 고개에 설치했다. 1930년대 인천도호부 자리인 문학초교 앞에 선정비 5기가 있었다. 선정비 훼손을 걱정해 1949년 부내에 흩어져있던 10기를 문학초교 앞으로 옮겨놓았으며, 1970년에는 선정비 3기를 더해 향교 앞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선정비는 모두 18기이나 인천부사 황운조의 비가 2기라 어 실제 인물은 17인이다.

민속놀이 비석치기의 정확한 연원을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이후 귀족들의 공적비나 송덕비 등에 불만을 품은 서민들이 그 비석을 돌로 치거나 훼손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더욱이 탐관오리들은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백성을 위협하거나 자신이 직접 재물을 들여 억지로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에 분개한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는 등, 화풀이를 했다. 이곳에 세워진 선정비들은 문제가 없는 것인지.

인천향교 앞 비석군. 비신(碑身; 비문을 새긴 돌)이 빠진 곳이 을사오적 박제순의 선정비 자리다.

민족반역자 박제순의 영세불망비

박제순은 1888년 5월 인천부사와 겸직으로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로 부임해 1890년 9월까지 2년 5개월간 복무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891년 8월 ‘행부사박공제순영세불망비(行府使朴公齊純永世不忘碑)’가 세워졌다.

박제순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할 당시 외부대신으로 고종의 비준도 없이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와 ‘한일협상조약‘을 강제 체결해 ‘을사오적’에 올랐다. 또, 1910년에는 내부대신으로 경술국치인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 그 후 박제순은 일제로부터 자작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이 돼 부귀영화를 누렸다.

2005년에 박제순의 선정비가 향교 앞에 세워져 있다고 알려지자,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철거 움직임이 일어났다.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는 박제순의 비에 ‘을사오적 매국노 박제순의 비’라는 표지를 붙이고 즉각 철거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에 인천시는 박제순의 선정비를 뽑아 재현한 인천도호부 담장 밑에 부직포를 덮어 방치했다.

올해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아 박제순 공덕비 처리여부가 언론 보도로 재조명됐고 인천시는 새로 구성한 시사편찬위원회에 의견을 물었다. 결론을 내지는 못했지만, 박제순도 인천의 한 역사인 만큼 원래 위치에 다시 세우고 안내판을 설치하자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시민단체인 미추홀구평화복지연대는 박제순의 비에 새겨진 내용 ‘행부사박공제순영세불망비’의 ‘영세불망비(영원히 잊지 말자는 비)’에 걸맞게 영원히 잊지말아야할 치욕의 역사로 남겨야한다는 의견을 표명하고 향교 선정비들 앞에 비석을 묻어 민족반역자인 박제순의 비를 시민들이 밟고 다닐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밖에도 비를 눕혀놓자, 거꾸로 세우자, 쪼개버리자, 박물관으로 옮기자 등 다양한 시민 의견이 있었다. 미추홀구는 100여 년 전 제작된 낡은 비석을 시민들이 계속 밟고 다닐 경우 훼손될 우려가 있으니 강화유리로 덮고 박제순의 친일행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세우자는 제안을 인천시에 공문으로 보냈고, 인천시는 검토 중이라고 한다.

박제순의 비를 ‘비석 밟기’를 통해서라도 치욕의 역사로 영원히 기억했으면 좋겠다. 국가와 민족에 해악을 끼치고 치부(致富)한 인간은 대대손손 이런 치욕을 당해야한다는 교훈이 필요하다. 강화유리로 덮으면 비석의 훼손도 막고, 나라를 팔아먹은 결과 이런 치욕을 당한다는 강렬한 교육적 효과도 있을 것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해 그동안 민족정기가 얼마나 훼손됐는가. 민족반역자는 죽어서도 치욕을 당해야한다는 당위를 가르쳐야한다. 이렇게 하는 것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2005년에 철거돼 인천도호부 담장 아래에 방치된 박제순 선정비.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달빛기행’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