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기념사업회, “더 이상 할 얘기 없다. 남은 건 이제 정부 몫”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죽산 조봉암 서거 60주기 추모제가 31일 오전 11시 망우리공원에서 열렸다. 죽산은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에 매년 11시에 추모제가 열린다.

60주기 추모제 죽산의 마지막 명예회복은 올해도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는 3년째 죽산의 추모제를 지켰으나 정작 유족과 기념사업회 등이 기대했던 죽산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유공에 대한 서훈 추서는 이뤄지지 않았다.

올해는 죽산이 태어난 지 120주년이자 서거 60년 되는 해이이고,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이다. 죽산이 강화에서 3ㆍ1운동을 시작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이끌며 산업화의 초석을 닦았기에 올해가 서훈 추서 적기로 기대됐다. 하지만 추서는 이뤄지지 않았다. 기념사업회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게 더는 없다고 했다.

죽산 조봉암 서거 60주기 추모제

죽산은 1899년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강화 3ㆍ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한 당대 엘리트였다. 죽산은 제1차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며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1939년까지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감옥에서 나와 인천에 정착했다. 박헌영과 갈등 끝에 공산당과 선을 긋고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제헌 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한 뒤, 평화통일을 주창하다가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누명을 쓰고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부역했다면 일제가 구속하고, 국민들이 8.15해방 때 연호했겠나”

죽산에 대한 첫 명예회복은 2011년 2월 이뤄졌다. 죽산은 서거 53년 만에 대법원 무죄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죽산이 잠시 일제와 타협했다는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1941년 12월 23일 자 신문에 ‘인천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 씨가 국방헌금 150원(현재 9000만 원)을 냈다'는 단신 기사를 토대로 추서를 안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죽산의 주소는 부평이었고, 그만한 성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는 2017년 유족에게 서훈에 필요한 보완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죽산기념사업회는 “당시 죽산의 사회적 위상을 고려했을 때 죽산이 그만한 돈을 냈으면 아마도 일제가 이를 이용하기 위해 대서특필해야 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단신 기사로 처리했다”며, 총독부 기관지 기사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반박했다.

기념사업회는 더이상 정부에 서훈 추서를 신청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도 기념사업회와 유족이 신청한 게 아니라, 정부가 자체적으로 검토한 뒤 추서를 보류했을 뿐이다. 기념사업회는 이제 남은 몫은 정부의 결정이라고 했다.

기념사업회 유수현 사무총장은 “국가보훈처는 국방 성금 문제를 반박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는데 우린 더 이상 제출할 자료도, 할 얘기도 없다”며 “죽산은 1945년 1월 일제예비검속으로 구속됐다가 8월에 풀려났다. 일제에 부역했다면 구속됐겠나. 우린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정부의 판단과 결정만 남아 있을뿐이다”고 말했다.

죽산 평전을 쓴 소설가 이원규 선생도 국방성금 단신기사의 신빙성에 의문을 표했다. 이원규 선생은 “죽산이 진짜 친일을 했으면 일제가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산은 헌금을 낼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오히려 8.15 해방 당시 죽산이 머물던 인천 집에 수백여명이 모여 그를 연호하며 환호했다. 친일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며 친일 논란을 일축했다.

온전한 명예회복은 독립운동과 건국 유공에 대한 서훈 추서

죽산 조봉암 서거 60주기 추모제

죽산은 독립유공 못지않게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죽산이 추진한 토지개혁은 강제로 땅을 뺏는 농지개혁이 아니었다. 정부가 지주한테 토지를 매입할 때 현금을 준 게 아니라 정부 농지채권을 줬다. 그런데 이 채권으로 땅을 살 땐 시중 가격의 30%밖에 안 됐다.

반면 일본 적산(=적의 재산)을 매입할 땐 채권 가격 그대로 인정해줬다. 즉. 땅을 사는 것보다 적산을 매입하는 게 나았다. 이 과정을 통해 남한 지주가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토대가 마련됐다. 반면, 농민들에겐 무상에 가깝게 공급했다. 그렇게 1950년 4월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됐다.

이원규 선생은 “죽산의 토지개혁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 오히려 남한이 유지될 수 있었다. 박헌영 등은 남쪽 농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남측 방식의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이 굳이 북한의 편에 설 필요가 없었다”며 “또한 이 시기 땅이 생긴 농민들은 그 돈으로 자녀들을 교육했다. 이들이 훗날 한국 경제발전을 이끈 베이비붐 세대로 자라게 되는데, 그 뿌리는 죽산의 토지개혁에 있다”라고 강조했다.

죽산의 온전한 명예회복은 그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유공에 대한 서훈 추서에 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과 죽산, 죽산의 명예회복은 독립운동 정신 계승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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