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희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투데이] 강화는 고려시대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38년간(1232~1270년) 수도였다. 천도 후 강화에서 죽은 왕실 사람들은 강화에 묻혔다. 가장 유명한 것이 홍릉이다. 홍릉은 고려 23대 왕 고종의 무덤이다. 「고려사」에서는 강화 천도가 최우의 겁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아무튼 강화 천도를 결정한 것은 고종이었다. 고종은 강화에서 사망했고 강화에 묻혔다. 또, 희종의 무덤 석릉이 있다. 신종의 맏아들 희종은 고려 21대 왕으로 내시 왕준명과 모의해 당시 기세가 등등한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해 오히려 폐위를 당하고 강화로 쫓겨났다. 이후 자연도(현 영종도)와 교동 등지로 옮겨졌다가 강도시기에 사망해 강화에 묻혔다.

왕비의 무덤으로는 곤릉과 가릉이 있다. 곤릉은 원덕태후의 무덤인데, 원덕태후는 고려 22대 왕 강종의 비이며, 강화 천도를 단행한 고종의 어머니다. 1239년(고종 26) 강도시기에 사망해 강화에 묻혔다. 가릉은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고종의 며느리이자 고려 24대 왕 원종의 비다. 순경태후 역시 1237년(고종 24) 강화에서 사망해 강화에 묻혔다.

강도시기에 조성된 왕릉의 피장자가 밝혀진 무덤은 4기이며, 누구인지 모르는 무덤은 능내리 석실분, 인산리 석실분 등이 있다. 얼마 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석릉 주변 고분군 발굴조사에서 격식 있는 고려시대 고분군이 확인됐고 앞으로도 더 발견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석릉, 곤릉, 가릉, 능내리 석실분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이뤄져 고분의 형태와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고려 왕릉의 피장자를 다시 비정해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돼 주목할 만하다. 작년에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고려왕릉 조영과 관리’라는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발표 주제로 제기된 내용이다.

위치상 가릉과 능내리 석실분은 바로 인접해있는데, 능내리 석실분은 피장자가 알려져 있지 않다. 가릉과 능내리 석실분을 비교하면 축조 순서가 능내리 석실분이 빠르고 규모도 더 큰 것으로 보아 능내리 석실분의 위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무덤 모두 인골 분석결과 피장자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강화에서 사망한 왕비는 순경태후, 원덕태후 그리고 희종 비 성평왕후인데, 원덕태후는 이미 곤릉에 묻힌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가릉과 능내리 석실분은 각각 순경태후와 성평왕후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제기했다.

성평왕후는 1247년 사망했다. 순경태후와 성평왕후를 비교할 때 순경태후가 10년 먼저 사망했고, 당시 고종은 15세 어린나이에 사망한 며느리(순경태후)를 애통해했으며 장례기간이 66일이나 됐다고 한다.

그에 비해 성평왕후는 폐위된 희종의 비로 단 8개월간 왕후의 자리에 있다가 폐위됐다. 이를 볼 때, 시기도 빠르고 위계도 높은 능내리 석실분이 순경태후의 무덤이며, 가릉은 성평왕후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석릉은 희종, 곤릉은 원덕태후의 무덤인데, 이 또한 곤릉이 석릉보다 무덤 조영에 공을 더 많이 들였고 규모도 크며 유물도 훨씬 많이 부장돼있어 곤릉이 희종의 능이고, 석릉이 원덕태후의 무덤일 가능성도 함께 제시했다.

위에서 제기한 내용은 설득력이 있었고 신빙성 있는 추론에 다수 학자가 공감했다.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더해진다면 고려 강도시기 왕릉을 새롭게 비정해볼 수 있는 여지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알고 있던 내용도 연구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열린 자세로 역사를 바라보고 연구하는 태도는 전문 연구자뿐만 아니라 시민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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