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꼭꼭 숨겨놓은 듯한 인천도호부청사
마치 꼭꼭 숨겨놓은 듯한 인천도호부청사
  • 천영기 시민기자
  • 승인 2019.07.2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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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천영기의 인천달빛기행
5. 인천도호부와 인천향교(상)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도호부 위치와 규모

인천도호부와 향교가 있는 곳을 ‘관교’동이라 하는데, 옛 인천부의 중심지다. 관청의 ‘관’자와 향교의 ‘교’자로 이뤄졌는데, 그만큼 힘의 중심지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인천 부내, 인천 읍내, 인주, 관청리, 향교리 등으로 불렸다. 1968년 문학동에 편입돼 동정 업무를 수행하다가 1996년부터 문학동에서 관교동이 분리됐다. 이런 관계로 지금 인천도호부는 문학동 문학초등학교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인천부읍지」를 보면, 당초 인천도호부에는 객사 20칸, 내외 삼문 3칸씩, 동헌 15칸, 내동헌 33칸, 공수 6칸, 사령청 9칸, 향청 13칸, 군관청 7칸, 훈무당 6칸, 질청 27칸, 옥사 4칸, 별무사청 42칸, 창고 6동, 좌기청 5칸, 수미고 4칸, 군기청 5칸 등이 있었다. 군기청 옆에는 인공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에 지소정(知小亭)이라는 정자가 있는 것으로 돼있어, 도호부청사 자리가 매우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다 없어지고 객사 일부와 동헌 일부만 원래 위치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조선시대 수령칠사(守令七事)

조선시대에는 수령칠사가 있었다. 임지로 떠나기 전에 임금 앞에서 이를 외우는데 순서가 틀리거나 잘못 외우면 그 자리에서 파면당하기도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아 「경국대전」에 규정된 내용을 올려본다.

농상성(農桑盛, 농사와 누에치기 번성), 호구증(戶口增, 호구 증가), 학교흥(學校興, 학교를 일으킴), 군정수(軍政修, 군 행정과 재정을 닦음), 부역균(賦役均, 부역을 균등하게 함), 사송간(詞訟簡, 송사를 간결하게 함), 간활식(奸猾息, 간사하고 교활함을 그침)이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군대를 지휘해 전투에 임하는 등, 군사지휘권도 가지고 있었다.

경제 번성, 인구 증가, 학교 교육의 중요성, 군 비리 척결, 공평한 세금 부과, 사법의 공정성, 부정부패한 공무원 추방 등 지금의 말로 바꿔도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공직의 자세다. 공직에 나가는 사람들은 최소한 이 정도 규범을 몸에 익혔으면 좋겠다. 공공 이익과 국민행복을 위해 일하는 고위 공직자들의 모습을 뉴스로나마 보고 싶다.

인천도호부 동헌의 팔작지붕과 객사의 맞배지붕.
인천도호부 동헌의 팔작지붕과 객사의 맞배지붕.
새로 조성한 인천도호부 객사.
새로 조성한 인천도호부 객사.

동헌으로 고건축 이해하기

우리가 여행지에 가서 고건축 안내판을 봐도 무엇을 설명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까닭은 기본적인 건축 용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용어를 간략하게 풀어쓰며 동헌과 객사를 설명해보겠다.

동헌은 지방 수령이 정무를 보던 집무실로,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와 구분돼 그 동쪽에 위치했기에 붙인 이름이다. 보통 중앙은 마루로 된 대청이며, 양쪽에는 온돌방 한두 칸으로 꾸며져 있다. 대청에서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을 했으며, 양쪽 온돌방은 숙식 공간이 아니라 사무 공간이나 응접 공간으로 사용했다.

동헌이 33칸이었다는 것은, 정면 11칸과 측면 3칸의 집을 의미한다. 현재의 동헌은 문학초등학교를 지을 때 건물 일부만 옮겨 정면 6칸과 측면 3칸, 총18칸 규모로 축소해 지은 것이다. 칸(間)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6칸이 되려면 기둥이 7개여야 한다. 옮겨 지은 동헌을 한 바퀴 둘러보면 얼마나 어이없게 옮겼는지 알 수 있다.

기와집을 지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지붕 무게 수십 톤을 어떻게 분산해 땅에 안전하게 전달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서까래로 대들보와 도리, 이를 받치는 기둥으로 무게를 분산해 주춧돌(초석)로 전달한다. 그러다보니 건물 하중을 온전히 받는 주춧돌은 집터를 달구질로 다진 땅위에 그대로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주춧돌을 놓는 자리 흙을 생땅이 나올 때까지 파서 다시 다져야한다. 이를 지정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고건축의 대표적 지정 방법은 네 가지다. 단순히 흙만을 달구질해 층층이 다지면서 쌓아올려 기초하는 판축지정, 모래를 층층이 물을 부어가면서 다져올려 기초하는 입사지정, 잔자갈을 층층이 다지면서 쌓아 올려 기초하는 적심석지정, 장대석을 우물정(井)자형으로 쌓아올려 기초하는 장대석지정이 있다. 지정은 주춧돌 위치가 옮겨졌거나 없어진 집터를 발굴할 때 기둥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인천도호부 동헌.
인천도호부 동헌.

동헌 정면 주춧돌들은 다듬은 돌 초석 중 원형(사다리꼴 원통형) 초석으로 놓았는데 가장 오른쪽 주춧돌은 누각처럼 지붕 처마가 높이 위치하는 건물에 주로 사용하는 사각장주석이 쓰였다. 그리고 동헌 측면과 뒷면 주춧돌을 보면,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다듬은 돌 초석과 다듬지 않은 막돌초석이 무질서하게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측면이나 뒷면은 사람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관계로 다듬지 않은 막돌초석을 놓을 수 있지만, 너무 심하게 무질서하고 불규칙적이다. 건물을 옮겨 축소해 지으면서 신경을 쓰지 않은 탓이거나 무지의 소산이리라.

기둥은 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되는 구조물로 입면 구성의 중요한 요소다. 건축물 높이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입면 크기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그리고 기둥 형태는 수직선의 요소가 돼 수평적 요소인 기단ㆍ도리ㆍ처마선ㆍ지붕마루선들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입면에 아름다움을 준다.

이런 기둥도 각기둥과 원기둥으로 나뉘는데, 각기둥은 다시 사각ㆍ육각ㆍ팔각기둥이 있다. 사각기둥은 보통 일반 주택이나 부속 건물에 많이 사용한다. 원기둥은 궁궐ㆍ사찰ㆍ관아 등 주로 권위 있는 건축에 많이 쓰이는데, 모양에 따라 원통형ㆍ민흘림ㆍ배흘림기둥으로 나뉜다. 원통형기둥은 머리ㆍ몸ㆍ뿌리의 지름이 동일한 크기로 주로 조선 후기 건물에 많이 사용됐다. 민흘림기둥은 기둥 상면 지름이 기둥 하면 지름보다 작은 것으로 역학적인 문제보다는 무게중심이 아래로 내려가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배흘림기둥은 기둥머리의 지름이 가장 작고 기둥 밑에서 3분의 1이 되는 곳의 지름이 가장 크며, 밑동 지름은 기둥머리보다 크지만 기둥몸보다는 작다.

동헌은 지방관들이 정무(政務)를 보던 중심 건물인데도, 이 건물은 사각기둥을 사용했다. 혹시 내동헌을 옮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는데, 사각기둥으로 지은 동헌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동헌을 지을 때 재정적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한다.

처마란 서까래가 기둥 바깥으로 내밀어져 생긴 것을 지칭하는데, 종류는 서까래만으로 이뤄진 홑처마와 서까래 위에 짧은 서까래(부연)를 잇대어 달아낸 겹처마가 있다. 동헌은 단아한 홑처마로 이뤄졌다. 겹처마를 사용하면 처마 길이가 늘어나 집이 화려하게 보이고 단열과 보온에도 탁월한 기능을 가진다. 보통 격이 높은 건물에는 겹처마를 많이 사용한다.

동헌 지붕은 팔작지붕 양식을 하고 있다. 하늘에서 봤을 때 여덟 팔(八)자 모습으로 우진각지붕 위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형태인데, 주로 ‘권위’건축에 많이 사용한다. 맞배지붕은 가장 간단한 지붕 양식으로 건물 앞뒤에만 지붕면이 있으며, 우진각지붕은 네 면 모두 지붕면을 가진 형태다. 초가집이 대표적인 우진각지붕이다. 이밖의 지붕 종류로 모임지붕이 있는데 용마루 없이 꼭지점 하나에서 지붕골이 만나는 형태로 사모ㆍ육모ㆍ팔모지붕 등이 있다.

객사의 용도와 구조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지어 사신 일행을 묵게 하거나 접대하기 위한 건물이다. 또한 암행어사와 같은 중앙관리는 객사에 머물며 지방 수령을 감찰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중앙의 전청에 안치하고 지방관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왕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려 충성을 다짐하는 삭망례(朔望禮)를 행했다. 그리고 왕이나 왕비 탄신일과 설날ㆍ한식ㆍ단오ㆍ추석ㆍ동지 등 명절에 객사 앞뜰에서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며 절을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이런 관계로 객사는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며, 관아 시설 중 격이 가장 높아 규모가 가장 컸다.

인천도호부 객사.
인천도호부 객사.

인천도호부 객사의 기본 구조는 중앙에 전패를 모시는 정청과 좌우에 대칭으로 사신이 묵는 방이 설치된 익사(翼舍)로 돼있다. 당초 20칸이었으나 현재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축소돼있는데, 이 자리로 옮기면서 정청만 남기고 익사는 헐어버렸다. 주춧돌은 기둥이 앉는 주좌를 둥그렇게 가공한 원형초석을 썼다. 기둥은 ‘권위’건축에 많이 쓰는 원기둥으로 배흘림기둥을 썼으며, 기둥 위에는 새 날개 모양의 부재를 두 개 끼운 이익공 양식의 공포를 올렸다. 처마도 격이 높은 겹처마를 사용했으며,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익사를 헐어버리니 자연히 맞배지붕만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붕 측면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널빤지인 방풍판을 붙였다.

군ㆍ관청은 해방 전 경찰파출소로 쓰다가 불에 타 없어졌다. 내동헌은 1955년까지 인천시 문학출장소로 쓰다가 출장소를 새로 마련함에 따라 교정을 확장하기 위해 헐어버렸다. 무지한 문화재 관리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철퇴를 맞은 결과이기도 하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은 전국 곳곳에서 도호부를 허물고 그곳에 학교를 세워 식민교육의 장으로 전락시켰다.

새로 지은 도호부는 문학경기장 맞은편에 복원돼 많은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주말이면 문화체험과 공연이 열려 여가의 장이 펼쳐지지만, 원래 도호부 터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인천도호부도 부평도호부도 건물 주변에 나무들을 심어놓아 건물을 제대로 살피기 힘들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1ㆍ2호이기에 꼭꼭 숨겨놓아야 하는 것인지, 그 까닭을 알고 싶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달빛기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