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회 인천마당서 강연

[인천투데이 정양지 기자]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이사장 신현수)가 주최한 제67회 ‘인천마당’이 지난 22일 저녁 부평아트센터 호박홀에서 열렸다. 김예지 피아니스트가 강사로, 손병걸 시인이 노래손님으로 무대에 섰다.

시각장애 피아니스트인 김 씨는 100회가 넘는 연주회와 ‘다차원 촉각 악보(3D 촉각 악보)’ 발명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음악인이다. 2019년 올해의 장애인상을 수상한 그는 장애인 음악교육 인프라 구축에 힘쓰고 있다.

김 씨가 들려준 끝없는 도전과 노력을 정리했다.

지난 22일 열린 제67회 '인천마당'에서 강연하고 있는 김예지 피아니스트.

내 인생은 물음표

내 인생은 물음표로 이뤄져있다. ‘누구?’에서 시작하겠다. 어렸을 때 나는 호기심이 많았고 앞이 안 보인다는 것도 모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넘어지곤 했다. 처음엔 머리부터 부딪히다가 턱, 가슴, 무릎으로 상처가 내려왔다. 한마디로 말 안 듣는 아이였다.

당시 어머니가 시골 보건진료소에서 근무했기에, 나는 자연에 둘러싸인 사택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이것저것을 만져보고 냄새 맡길 좋아했다. 그땐 앞이 조금 보이긴 했지만, 책을 읽거나 누군가를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돼 서울로 갔다.

법적 생년월일이 늦어 학교 병설 유치원생으로 입학해야 했는데, 반이 개설되지 않아 초등학교 1학년 수업에 껴들었다. 1학년 수업은 정말 재미없고 어려웠다. 숙제를 하려면 눈으로 글씨를 읽어야했기 때문이다. 청강생으로서 고된 1년을 보내고 진짜 1학년이 되니 엄마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전맹’반에 보내주셨다. 그 이후 점자를 접했다.

피아노가 들려준 대답

나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다뤘고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한 번에 음을 알아듣는 아이’ 같은 부류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것이 대단한 재능이라고 여기지 않으셨다. 어떻게 해서 피아노를 치게 됐냐고 묻는다면, ‘할 게 없어서’다. 밖에 나가도 할 게 없었고 그렇다고 집에서 TV를 볼 수도 없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00명 남짓한 작은 곳이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애국조회를 했는데, 선생님들은 항상 나에게 피아노 반주를 시키셨다. 그건 굉장히 뿌듯한 일이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음악으로 내 존재 가치를 자각한 것이다.

할머니를 졸라 음악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피아노를 쉬지 않고 쳤다. 음악을 향한 내 마음과 그것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 이상 멈출 수 없었다. 끊임없이, 게다가 겁 없이 했다. 개인 레슨을 봐주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콩쿠르에 나갔고 상도 받았다.

하지만 음악인생이 계속 즐겁게 펼쳐지진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입시라는 현실이 다가왔다. 지금은 시각장애인 특수학교도 인문반ㆍ취업반으로 나뉘는데, 내가 다닐 때는 취업반밖에 없었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별이 있겠나. 시각장애인 반에서는 침ㆍ안마ㆍ마사지ㆍ지압을 가르쳤다. 내가 진짜 피아노를 전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하면서 혈 자리를 외우고 안마를 실습했다.

입시를 도와줄 선생님을 찾기도 어려웠다. 내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절한 사람도 있었고 ‘잠깐 하다 말겠지’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입시에 유능한 선생님을 소개받았는데, 흔쾌히 받아주셨다. “늦었지만 해보자”라며.

김예지 피아니스트와 안내견 조이.

‘한낱’ 대학생활

대학에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했다. 그때는 장애학생지원센터도 없었고 비장애인들의 인식도 ‘우리 학교에 시각장애인이 들어왔네, 신기하다’가 끝이었다. 나는 중증장애인에 포함된 1급 시각장애인이었고 내 존재를 계속해서 알려야했다. 학교에서 수업자료를 나눠줘도 악보와 외국어투성이라서 집에 가서 읽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방학이 돼도 진도를 따라잡느라 놀러갈 여유가 없었다.

공부랑 연습밖에 할 게 없으니 성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그게 다른 아이들에겐 눈엣가시였나 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은따’였다. 다행이었던 건, 교수님도 나를 놀게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학교 대표로 음악회에 내보내기도 했고 수업 때 아이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라고도 하셨다.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는 점이 고마웠다. 그래서 과에서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안내견 ‘창조’와 함께 했다. 그땐 안내견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식당에도 못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느 날 삼성화재에서 안내견 홍보 광고를 제안해 모델로 출연했다. ‘내 장애가 틀렸나? 걸림돌만 되는 건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나 말고 다른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지금처럼 열심히 살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게 생긴다는 걸 깨달았다.

다름을 이해하면

나만의 다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졌다.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유학을 결심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는 교과서를 구입하면 출판사에서 텍스트 파일로 보내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영어도 빨리 늘었다. 산더미 같은 숙제를 하느라 연습에서 손을 놓게 되자, 석사 과정과 최고 연주자 과정을 병행했다.

어려웠지만 감사했던 시절이다. 제일 좋았던 점은, 음악으로 내 생각을 무한히 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뒤 박사 과정 논문을 준비하는 내내 한 생각은 ‘So what? Who cares?(그래서 뭐 어쩔 건데?)’였다. 나는 남들과 다른, 나만이 잘 할 수 있는 논문을 쓰고 싶었다. 결국 음표를 직관적으로 알기 힘든 점자 악보의 단점을 극복해 ‘다차원 촉각 악보’를 발명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많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교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고 독주회도 열었다. 많은 대중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고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했다. 2018년 평창 패럴림픽 폐막식 무대에도 섰다.

여전히 내 인생은 물음표로 이뤄져있다. 궁금하지 않으면 좀이 쑤신다. 지금도 음악 외에 다른 활동을 하고 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살면서 앞으로도 물음표 몇 개를 마주하게 될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노래손님으로 초대받은 손병걸 시인은 ‘인연’을 주제로 한 노래 세 곡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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