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47>
쉬라즈, 하페즈 영묘

하페즈 시인의 영묘 전경.

[인천투데이] 쉬라즈는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남서쪽으로 900여㎞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거울’이라는 명칭에 맞게 수많은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이 도시는 해발 1500m에 세워진, 고대 실크로드 무역의 요충지였다. 산과 들 사이로 모스크들이 자리 잡았고 건물들 앞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다. 도로는 넓고 시원하다. 요충지가 가진 장점이 오늘날까지도 그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이러한 이유로 쉬라즈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여가를 즐기러오는 문화도시로 당당하다.

쉬라즈는 장미의 도시다. 수많은 볼거리를 간직한 쉬라즈는 언제나 전 세계에서 찾아온 수많은 여행자로 붐빈다. 내국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쉬라즈에 온 내국인들이라면 반드시 찾아가는 곳이 있다. 그냥 관광하듯 가는 곳이 아니다. 삶의 고민과 갈증을 푸는 곳이자, 자신의 소망과 바람을 기원하는 곳이다. 으리으리한 궁전도 아니고 사원도 아니다. 강물이 흐르는 화려한 공원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장미꽃 넝쿨이 우거진 정원 안에 있는 단출한 정자(亭子)다.

하페즈 시인의 묘가 있는 정자.

이란인들은 그 어떤 위인보다도 시인을 사랑한다. 그래서 항상 시인의 영묘를 찾는다. 시인의 묘비나 시비 앞에서 지치고 피곤한 일상을 위안 받는다. 쉬라즈는 모든 이란인이 사랑하는 두 시인, 하페즈와 사디가 태어난 곳이다. 그래서 쉬라즈를 ‘시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쉬라즈에 온 이란인들은 제일 먼저 두 시인의 영묘를 찾는다. 그들이 지은 시를 암송하며 시인과 무언(無言)의 대화를 나눈다. 심신의 황폐함, 삶으로부터 파생되는 희로애락과 생로병사, 사랑과 이별, 존재자로서 외로움과 고독함 등을 공감(共感)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다. 이들에게 시인은 삶의 벗이자 인생의 안내자다.

이란 최고의 시인으로 칭송받는 하페즈의 영묘를 찾았다. 장미넝쿨 늘어진 영묘 입구는 참배객들로 붐빈다. 오늘도 시인과 대화하고픈 남녀노소가 영묘 안에 가득하다. 입구 벽면엔 화려한 이슬람 문양과 시인이 지었다는 시가 새겨져있다. 참배객들은 아랍어로 새긴 시에 손을 대고 기도하듯 시를 암송한다. 그리고 시인의 관 위에 손을 얹고 나지막하고 경건한 목소리로 시인과 교감을 시도한다.

시인의 묘에 손을 얹고 소망을 비는 사람들.

하페즈는 페르시아 최고의 서정 시인이며 궁정 시인이었다. 그가 이곳에 묻힌 지도 벌써 600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소박한 정원과 연못이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인다. 이란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리라.

14세기 페르시아 최고의 시인인 하페즈는 ‘가잘’이라 불리는 시를 썼다. 그의 시는 술과 사랑을 소재로 신과 연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실은 서민들의 삶에 대한 연민, 위선에 대한 경멸과 궁극적 실체에 대한 탐구를 역설과 반어의 형식으로 노래했다.

하페즈의 시를 관통하는 이념은 수피즘이다. 수피즘은 인간이 스스로 신비한 체험으로 자신을 소멸함으로써 ‘신인합일(神人合一)’에 도달하고자하는 사상이다. 참배객들은 이러한 신인합일 정신을 추구했던 시인과 교감으로 위안 받고자하는 것이다. 이란인들은 하페즈의 시집을 쿠란처럼 소중히 여긴다. 이란인의 시에 대한 사랑이 쿠란과도 같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시를 생활의 일부분으로 여긴다. 모임이나 잔치 때에도 누구나 하페즈의 시 한두 편은 암송한다. 마치 우리가 김소월의 시를 외우는 것처럼 말이다.

페르시아의 시성으로 불리는 하페즈 시인상.

사랑의 열병을 앓았으니, 묻지 마라.
이별의 독을 맛보았으니, 묻지 마라.
세상을 돌아 다녔으며 마침내,
난 연인을 선택했으니, 묻지 마라.
그렇게 그녀 문간의 흙을 보고 싶은 맘에,
내 눈물이 흐르니, 묻지 마라.
난 어제 그녀의 입이 내 귀에 속삭인,
얘기를 들었으니, 묻지 마라.
그대는 왜 나를 향해 입술을 깨물고, 왜 말하지 않았느냐,
내 그대 붉은 입술을 깨물었나니, 더 이상 묻지 마라.
나 자신 가난한 생활의 오두막에서 당신 없이
고통을 겪었으니, 묻지 마라.

페르시아 문학의 정수는 시다. 그리고 이 시는 중세 세계문학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할 정도로 세계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도와 터키는 물론 아랍 문학의 태동도 페르시아였다. 또한 페르시아 시문학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그리스를 오가며 동서양 문학을 연결했다. 중국의 당나라 때는 시가 번창했다. 당대의 위대한 시인인 이태백도 페르시아계 출신이다.

페르시아는 많은 시인을 배출했다. 하페즈 외에도 사디, 오마르하이얌 등 수십 명에 이른다. 오마르하이얌이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란인들은 단연코 하페즈를 ‘페르시아의 시성(詩聖)’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하페즈의 시가 이란인들의 정서와 융합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아랍세계와 서구세계에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다. 괴테는 ‘대적할 자가 없는 시인’이라고 극찬했고 그의 시적 소재들을 모방해 ‘서동시집’을 펴냈다. 17세기 스페인의 칼데론, 영국의 바이런,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니체도 ‘하페즈에게’라는 시를 썼을 정도로 하페즈는 세계적인 시인이었다.

시인의 영묘 입구에 있는 아름다운 이슬람 문양.
중국이 詩仙으로 부르는 이백도 페르시아계 출신이다.

하페즈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약속이 있는데, 우정과 애정이 그것’이라고 했다. 이는 시인의 인본주의적 삶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 사랑과 정, 그리고 평화를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오늘도 평화라는 미명 아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우정과 애정이 배신과 복수로 변하고 결국은 파탄과 죽음만을 양산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언제나 도시에서 시작되고 국가의 흥망성쇠와 함께 명멸한다. 그리고 폐허 위에 새롭게 국가와 도시가 세워지면 또다시 꿈틀거리며 살아나 역사의 전철을 되밟는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적 삶이던가.

하페즈의 시가 이란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인류의 영원한 꿈이자 신기루인 ‘평화’와 ‘사랑’을 쉽고 아름답게, 그리고 담담하게 노래했기 때문이다.

영묘가 있는 정자에는 오늘도 600년 전의 하페즈를 그리며 그의 시를 읽고 그의 시를 암송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도시와 국가는 먼지가 돼 바람처럼 사라졌어도 시인은 오늘도 이들과 마주한다. 제국의 황제가 통치자는 될지언정 백성의 마음까지 통치하지는 못한다. 진정한 통치자는 백성의 공통분모를 보듬고 어우르는 자다. 그럴 때 만백성은 진심으로 따른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다.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그랬다’고 기록할 뿐이다. 오늘도 하페즈의 시를 암송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 허우범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곳곳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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