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천영기의 인천달빛기행
4. 미추홀구 고인돌길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 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으로, 고대 국가 발생직전 사회상을 보여주는 무덤 양식이다. 유럽ㆍ아프리카ㆍ아시아 등 전 세계에 고인돌은 8만여 기가 존재하는데 50% 정도가 우리나라에 분포돼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고인돌 나라’라 부른다. 이런 까닭에 가장 밀집도가 높고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강화ㆍ고창ㆍ화순 고인돌군이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고인돌이란 이름은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한다.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 유럽 등지에서는 돌맨(Dolmen, 탁자돌)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문학산을 주산으로 하는 인천 미추홀구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모두 12기로 알려져 있다. 학익동 8기, 주안동 3기, 문학동 1기인데 현재 4기만 보존되고 있으며, 그 중에 단 한 기도 원래 위치에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고인돌 원위치가 확인되는 곳과 현재 전시되는 곳을 찾아 나름 고인돌길을 만들었는데 교육 현장으로 쓰였으면 좋겠다.

주안동 고인돌과 문학동 고인돌.

‘학익동 고인돌’의 수난

학익동에 있는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한 사람은 192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촉탁을 받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와 사와 준이치(澤俊一) 등이다. 이때 문학동 고인돌 1기를 확인했으며, 한 곳에 나란히 모여있는 학익동 고인돌 3기를 발굴했는데 고인돌 내부에서 민무늬토기 조각, 돌살촉, 돌칼, 지석 등을 출토했다.

이어 1929년에는 경성대학에서 학익동 고인돌 8기를 확인했고 그 중에서 3기를 발굴해 2기를 복원했으며, 돌도끼와 갈판돌 등 석기류를 다수 출토했다. 이때 수습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있다. 1938년 이곳에 인천소년형무소(현재 인천구치소, 인천지방법원과 검찰청)가 들어서며 대부분의 고인돌이 사라지고 서쪽 언덕에 1기만 남았는데, 이것이 ‘학익고인돌Ⅰ’이다.

학익사거리에서 용일사거리 방향으로, 학익시장 버스정류장 뒤로 신축하는 건물을 끼고 대안파크타운 쪽으로 가면 철조망이 쳐진 둔덕 위에 주황색 배드민턴장 건물이 보인다. 이 철조망 안쪽 건물 아래에 ‘학익고인돌Ⅰ’이 있었다. 고인돌이 있었다는 표지판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잡초만 우거져있다.

이곳에 있던 ‘학익고인돌Ⅰ’은 1971년 인천시립박물관(현재 제물포구락부)으로 옮겨 전시됐다.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1990년에 인천시립박물관이 청량산 자락으로 이전하면서 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1998년에 법원 신축 공사를 할 때 고인돌 1기가 땅속에서 발견됐다. 이것 역시 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 ‘학익고인돌Ⅱ’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시립박물관을 개관할 때는 박물관 정문이 야외전시장 쪽에 있어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학익고인돌을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정문을 뒤로 옮겼고 야외전시장은 직원 주차장으로 쓰여 일부러 고인돌을 찾는 사람이 아니면 볼 수 없다. 원래 위치와는 상관없이 자리를 옮겨 홀대받는 모습이 안쓰럽다.

출토된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고인돌은 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간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무덤을 옮겨 놓고 감상한다는 것이 왠지 꺼림칙하다. 모형을 만들어놓고 원형은 제자리에 놓아둬야한다. 그래야 후손들이 과거로 여행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다. 이끼가 켜켜이 내려앉은 유적ㆍ유물을 바라보며 선인들과 묵언 대화를 즐기는 것, 이것이 바로 역사를 살아 있게 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학익고인돌Ⅰ.
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학익고인돌Ⅱ.

‘주안동 고인돌’과 ‘문학동 고인돌’을 찾아서

인천구치소 정문 건너편으로 길을 가다 신화빌딩을 끼고 100여m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미추홀공원 안에 ‘주안동 고인돌’과 ‘문학동 고인돌’이 있다. 두 고인돌 모두 덮개돌과 굄돌이 분리돼있는데 이 고인돌들도 수봉공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굄돌의 본래 형태를 알 수 없어 해체해놓았다고 한다.

‘주안동 고인돌’은 마을 사람들이 ‘너분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1957년 발굴조사를 했는데 용일사거리 근처 중앙메디칼의원(옛 경기은행) 뒤쪽 사미부락 언덕에 있었다. 발굴 당시 덮개돌과 굄돌 2개, 판석 1개가 나왔다. 이 사미부락 일대를 대규모 택지로 조성하기 위해 평탄작업을 하는 바람에 1979년에 수봉공원 반공회관 언덕 옆으로 이전했다. 그러다 2005년에 수봉공원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고인돌을 훼손할 위험이 있어 이곳으로 옮겨왔다.

‘주안동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성혈(性穴) 수십 개가 있다. 성혈은 바위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컵 모양 혹은 원추형 홈인데, 민속에서는 ‘알 구멍, 알 바위, 알 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것들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거나 고대 별자리를 나타낸다. 이렇게 볼 때 ‘주안동 고인돌’은 무덤보다는 제단으로 쓰인 것이 아닐까. 덮개돌 가운데는 움푹 파져 거무죽죽해 제단에서 무엇을 태운 기름자국인가 했더니 빗물이 계속해서 고여 햇빛에 마르면서 생긴 자국이었다.

‘문학동 고인돌’은 도천현 남쪽 밭에 있었는데, 이것도 택지 조성으로 1979년에 수봉공원 궁도장 담 안쪽으로 이전했다가 ‘주안동 고인돌’과 같이 이곳으로 다시 옮겼다. 1962년 발굴 당시 마름모꼴 덮개돌만 있고 굄돌은 없었다. 발굴 당시 덮개돌 윗면에는 채석을 위한 흔적이 일렬로 남아 있고 누군가 ‘연예바위’ 등 낙서를 많이 새겨 놓았다.

대각국사 의천 탄생 추정지.

고인돌 추정지 연학초등학교

연학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서쪽 끝으로 가면 연학쉼터라는 자그마한 언덕이 있다. 이 쉼터가 조성되기 전에 고인돌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돌이 놓여 있었다. 주변 주민들이 다 고인돌이라 했기에 나도 10년 전쯤에 찾아가 사진을 찍어뒀다. 그리고 작년까지도 고인돌길을 안내하면서 덮개돌을 확인했다.

그런데 올해 3월에 가보니 돌은 사라졌으며, 꽃길과 언덕으로 변했다. 그래서 경비원에게 물으니,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고인돌로 추정되는 돌이 있었는데 언덕을 만들며 아마도 흙에 묻혔을 것이라 했다. 트럭이 수시로 드나들며 엄청난 양의 흙을 쏟아 부었다고 덧붙였다. 힘이 빠졌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제 돌의 행방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주변을 돌들로 조경한 것을 보면 묻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다시 가서 조경한 돌들을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연학초교를 나와 그 옆 인주초교에 들어가면 중앙현관 옆에 ‘대각국사 의천 탄생 추정지’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의천은 고려 문종과 인예 태후 사이에 출생한 왕자로 11세에 출가를 자원했다. 인예 태후 아버지가 인주 이씨 시조인 이허겸의 손자 이자연이다. 이자연의 집이 인주골에 있었다니 인예 태후가 이곳에서 몸을 풀었을 것이라 추정한 것이리라. 의천은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창시했고 불교사상 최초로 「속장경」을 편찬ㆍ간행하는 업적을 남겼다. 잠깐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학인고인돌을 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1971년, 굿모닝인천).

도천현 반석과 ‘문학동 고인돌’의 위치를 찾아서

신동아 6차 아파트를 지나 사거리를 건너 밴댕이무침으로 유명한 금산식당을 지나 계속 동쪽으로 올라가면 무지개교회가 나온다. 무지개교회 뒤로 우성빌라가 줄지어 서있어 문학산을 가리고 있는데, 이곳에 도천현(禱天峴) 반석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무지개교회 자리가 과거에는 도천현 고개 정상이다. 택지 개발과 문학터널 공사로 지형이 워낙 많이 변해서 과거 항공사진으로 보지 않으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도천현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고개란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인천도호부 서쪽 1리에 사직단이 있다고 기록돼있는데 이 반석이 있는 위치와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사직단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고인돌로도 추정하기도 한다. 문학터널 공사가 한창이던 1990년대 초반에 이 부근을 답사할 때 지상에 노출된 큰 바위를 보고 혹시 이것이 도천현 반석이 아닌가 하며 지나갔는데, 사진을 찍어두지 않은 것을 이렇게 후회할 줄이야.

이곳에서 문학으로 가는 옛 도로에 내려서면 SK황금주유소가 있다. 그 길 건너편에 유일하게 초록색 울타리를 치고 밭농사를 짓는 곳이 있는데, 바로 ‘문학동 고인돌’이 있던 장소다. 역시 이것도 지금은 미추홀공원에 전시돼있다.

문학산 일대 미추홀구에 고인돌이 집중 분포돼있는 것을 볼 때, 이곳은 선사시대에 세력을 가진 집단에 매우 적합한 터전이었을 것이다. 비류 역시 문학산에 터전을 잡은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미추홀구는 ‘학익고인돌ⅠㆍⅡ’와 ‘문학동 고인돌’은 원래 위치로 돌려놓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선사시대부터 비류백제의 건국을 품은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구민들이 체험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구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달빛기행’을 하고 있다.

미추홀구 고인돌길 코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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