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코 양쪽 얼굴 피부가 울긋불긋한 것이 근질근질하고 각질이 일어났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음식을 잘못 먹으면 목에 발진이 생기긴 했지만, 얼굴이 가려운 건 처음이었다. ‘병원에 가야지’ 생각만 하고 하루 이틀 미루다보니 석 달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가려운 부위가 넓어지고 염증까지 생겼다. 참다못해 피부과에 갔다. 의사를 만난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지루성 피부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바르는 약과 먹는 약을 처방받았다.

처방전을 받으면 약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곤 한다. 조심해야할 약으로 보통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항생제, 다른 하나는 스테로이드제이다. 내가 먹어야할 약은 두 가지 다였다. 항생제는 흔히 염증이 생겼을 때 먹는 약이다. 그렇다면 스테로이드제는 뭘까.

스테로이드제는 간단히 말해 호르몬 성분 약이다. 호르몬은 몸에서 만들어지는 화학물질로 기분과 행동, 수면, 면역, 대사, 성장 등 많은 활동에 관여하는 중요한 물질이다. 특정한 분비샘에서만 나오고 혈액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며, 정해진 기관에서만 제 역할을 한다.

인체에는 뇌하수체, 갑상샘, 난소와 고환 등 호르몬 분비샘 아홉 개가 있다. 스테로이드는 그중 부신이라는, 양쪽 콩팥 위에 붙은 내분비기관에서 만들어지고 분비된다. 스테로이드제는 몸이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해 분비하는 코르티솔과 같은 호르몬을 본떠 만든 합성 약물이다. 염증과 알레르기를 빠르고 강하게 잠재우는 효과가 있지만 부작용도 커 정확한 처방에 따라 복용해야한다.

지금은 이렇게 호르몬을 병 치료에 사용하지만, 사실 호르몬의 정체는 19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밝혀진 것이 거의 없었다. 1848년 독일에서 수탉의 고환을 떼어내거나 이식하는 실험으로 고환이 어떤 물질을 혈액으로 분비하고 그 물질이 전신으로 퍼져나가 특정한 곳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다.

본격적인 연구는 1902년, 스탈링과 베일리스라는 영국생리학자들의 실험실에서 이뤄졌다. 이들은 갈색 개 한 마리를 데려와 소화관 근처 신경을 모두 잘랐다. 신경이 잘린 개의 췌장에서 소화액이 분비되는 것을 보고는, 췌장이 소화액을 분비하는 과정은 신경과 관계없는 화학적 반사임을 밝혔다.

그런데 어느 날 베일리스의 강의실에 동물 실험을 반대하는 운동가 두 명이 숨어들었다. 마침 그날 베일리스는 두 달 동안 이어진 생체 실험으로 엉망이 된 갈색 개를 다시 데려와 전기로 침샘을 자극하는 실험을 했다. 그리고 갈색 개는 췌장을 적출당한 채 죽었다.

사실 영국에는 1876년부터 ‘동물 학대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있었다. 그 법에 의하면, 한 동물은 한 번만 실험에 사용해야했고 실험동물에게는 실험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진통제를 투여해야했다. 하지만 베일리스와 스탈링은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법정 다툼 결과, 오히려 동물 실험을 반대하는 쪽이 명예훼손으로 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갈색 개는 어차피 안락사 될 예정이어서 다른 개를 사용하는 대신 그 개를 ‘재사용’했고 진통제를 불충분하게 사용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2년 후 스탈링은 런던왕립학회 강의에서 세계 최초로 ‘호르몬’이란 말을 사용했다. 호르몬은 ‘흥분시키다’ 또는 ‘자극하다’라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호르마오’에서 따온 것이다. 이듬해인 1906년, 런던 어느 잔디밭에 한 독지가의 후원으로 갈색 반려견 동상이 세워졌다. 이듬해 이 동상을 의대생들이 부수려해 동물 실험 찬반 시위와 논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동상은 1910년에 철거됐다. 그리고 1985년, 한 공원 구석에 다시 건립돼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가 먹고 있는 피부병약도 그 갈색 개의 희생과 연관이 있다. 이 약이 없었다면 내 피부병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을 죽여 인간이 편해지는 게 옳은 걸까. 좀 쉬고 몸에 좋은 걸 먹었다면 피부가 좋아지지 않았을까. 약 한 알을 앞에 두고서 생명의 존엄을 떠올리다니, 대책 없는 이중성에 서글프다.

※ 심혜진은 2년 전부터 글쓰기만으로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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