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항일운동 근거지, ‘인천청년동맹’

[인천투데이] ‘역사의 큰 수레바퀴는 대중의 조직적 단결과 충실 건전한 투쟁의 위력으로써 급변케 하니 우리는 이 위대한 법칙에 따라 우리 운동이 조직적 통일로부터 합리적 승리의 끝을 바라고 급진함을 본다.’ 한문 투 문장을 요즘 표현으로 약간 바꾼 이 문장은 1927년 1월21일 <중외일보(中外日報)>에 실린 인천청년동맹 창립 기사 중 일부다.

중외일보 1927년 1월 21일자 인천청년동맹 창립 기사

‘세 단체 해산 즉시 인천청년동맹 성립’이라는 기사 제목처럼 제물포청년회, 병인(丙寅)청년회, 무산(無産)청년동맹이 각각 해산하고 하나로 뭉치기로 했다. 일제 경찰의 집회 금지로 창립은 서면으로 진행했다.

집행위원 명단도 발표했는데, 여기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리해 제공한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에 나오는 인물들이 포함돼있다. 서무 유두희(劉斗熙), 교무고일(高逸), 검사위원 조준상(曺埈常)이다.

1927년 3월 25일 <중외일보> 기사를 보면, 서면 창립으로부터 두 달 가까이 지난 1927년 3월 17일에 애관(愛館)에서 발회식(發會式)을 성대히 개최했다. 유두희가 사회를 보았고 고일은 임시 의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했으며, 이희영(李熙榮)ㆍ고일ㆍ조준상ㆍ김성규(金聖圭)ㆍ 이창문(李昌文)ㆍ고익상(高翊祥)ㆍ김덕진(金德鎭)ㆍ박성원(朴聖源)ㆍ진해룡(陳海龍)ㆍ김창배(金昌培)ㆍ박수남(朴壽男)ㆍ손창신(孫昌新)을 위원으로 선출해 운영 방침을 일임했다. 함께 영화를 관람하는 것으로 산회했다.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 고일(본명 고희선, 1928 / 1930)

집행위원 중 한 명인 김성규 역시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에 있으며, 손창신은 3ㆍ1운동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으로서 전화선 절단으로 널리 알려진 김명진 지사와 함께 재판을 받은 인물이다. 최종판결이 무죄여서 만세운동 등에 어느 정도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3ㆍ1운동 당시 16세 소년에서 20대 중반이 된 1927년에 인천청년동맹 주요 구성원으로 활약했으니 그 의지가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인천청맹(仁川靑盟)’이란 약칭으로 불린 이 단체의 활동 중 특기할 만한 것이 1929년 4월 28일 개최한 청맹 산하 각반 대항 야구대회다. 1929년 5월 2일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인 공설운동장에서 외리, 내리, 화평리, 송현리, 용리, 율목리ㆍ유정리 연합팀, 신화수리, 송림리, 금곡리ㆍ우각리 연합팀 등 모두 아홉 팀이 참가했다.

‘…연일 어둡고 흐리던 날씨도 쾌청했고 겸하여 휴일이었으므로 관중이 아침 일찍부터 운집하여 사람들로 산을 이루었으며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각반 선수의 묘기는 관중의 환호를 불러 보기 드문 대성황리에 경기를 종료하였는데…’라고 <동아일보>는 현장분위기를 전했다.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 유두희(1928/930)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자락 널찍한 분지에 자리잡은 운동장 주변 능선마다 사람들로 가득찬 광경과 관중이 경기를 보며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회원들 결속을 다지고 시민 관심을 이끌어내면서 단체의 존재감과 목표를 과시하려한 합법적 테두리의 활동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면 특정 사상에 치우쳐 은밀하게 활동하는 비밀조직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조직을 지향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도 인천청맹 구성원들의 의지가 나약한 것은 아니었다.

1903년생으로 ‘인천석금(仁川昔今)’의 저자로 잘 알려진 고일은 1930년 3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관계자로서 유두희ㆍ조준상과 함께 재판을 받았으며, 1932년에는 비밀결사 반제동맹 사건으로 인천에 내려온 동대문서 형사대에 의해 2월 25일 오후 조준상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1901년생으로 본적과 출생지가 화정 1정목 88번지이고 우각리 27번지에 살았던 유두희는 1927년 9월에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고일ㆍ조준상과 함께 활동했으며, 1934년 5월에는 독서회 조직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 조준상(1928/1930)

고일이 쓴 ‘인천석금’에는 유두희와 4ㆍ19혁명 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던 곽상훈이 술집에서 이론투쟁을 하다 야구 배트로 치고받아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정도로 싸웠다가 바로 붕대를 감고 나서 또 같이 술을 마셨다거나, 조선 선원에게 술값을 떠넘기는 일본 선장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와 개천 속에 집어넣고 때리더니 일본 순사에게는 천연덕스럽게 선장 놈이 제풀에 헤매다가 개천에 빠졌다고 말했다는 등,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키가 170cm 정도로 당시로서는 작지 않은 체구인데다 두주불사(斗酒不辭) 느낌도 주고 익살스러운 면모도 있는 것 같아 실제 성품을 알기는 어렵지만, ‘유쾌한 사회주의자’라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반면에 굳게 다문 입으로 사진을 찍은 조준상은 ‘진중한 활동가’라는 인상이다. 1902년 또는 1904년생으로 본적과 출생지가 용리 120-12번지로 고일ㆍ유두희와 오랫동안 교유(交遊)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매일신보> 1925년 11월 18일 기사를 보면, 인천축구협회가 1925년 11월 23일 오전 8시 인천공설운동장에서 개최 예정인 전인천축구대회 대회위원으로 유두희ㆍ이수봉ㆍ곽상훈과 함께 나오는데, 일찍부터 청년운동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1930년 6월 25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인천 야체이카의 책임자는 이승엽, 회원은 조준상ㆍ고희선 등이라 했으니, 청년운동에서 모색한 활동 진로가 1930년을 전후해 사회주의 경향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같은 사건으로 체포ㆍ투옥됐으므로 같은 날 찍힌 사진을 남겼다. 1928년 8월 11일에는 일상복 차림으로, 1930년 6월 18일에는 수형복을 입고 찍었다. 늘 함께한 한두 살 터울 친구들이 함께한 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고조된 항일 열기는 1930년대 사회주의 계열 활동가들의 노동운동으로 활발해지는데, 정작 1920년대에 인천에서는 뚜렷한 항일 움직임을 보기 어렵다. 물론 조선공산당 창당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계열의 조직화 움직임과 이에 대한 일제 당국의 검거에 인천 출신이 포함된 경우는 있으나, 직접적으로 항일을 내세운 지역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3ㆍ1운동에서 1930년대를 연결하는 시간으로 1920년대는 의미가 작지 않음에도 항일을 표방한 활동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여러 갈래에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인천에서는 ‘인천청맹’이 바로 그 시간을 메우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3ㆍ1운동으로 크게 달아올랐다가 식어가는 독립의 열기를 조직적으로 널리 퍼뜨리기 위해 대중과 접촉할 수 있는 야구ㆍ축구 등 다양한 체육행사도 열고 다른 한편으로 전국 청년단체와 연대하며 활동가를 양성하는 일종의 근거지로서 인천청년동맹을 평가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기억해야할 낯선 이름’이란 역설을 인천이 갖고 있다. 해방 뒤에도 활발히 활동한 고일의 경우는 다르지만,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와 체포, 재판을 전하는 신문에서만 확인되는 유두희와 조준상은 바로 인천이 갖고 있는 역설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까?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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