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맥주 양조법은 고대에서부터 중세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보리 혹은 밀 등 곡식 몰트를 사용해 발효시키는 양조 방법은 지금까지도 거의 동일하다. 맥주 양조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홉(hop) 사용에서 찾을 수 있다. 맥주의 오랜 역사에 비해 홉은 비교적 최근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홉을 사용하기 전에는 맥주에 주로 허브 일종인 그루이트(Gruit)를 첨가해 양조했다.

맥주 양조에서 홉 사용은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홉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지금 우리가 마시는 쌉쌀한 맛이 나는 맥주가 됐으며, 맥주 보존성이 개선돼 맥주 산업이 발전했다.

‘홉 사용’ 최초 기록, 822년 프랑스 수도원

맥주에 홉을 처음 사용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여러 의견이 있는데, 9세기경 맥주에 처음 홉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은 서기 822년 기록이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문서를 보면, 프랑스 아미엥 지역에 위치한 코르비 수도원의 아델하르트 원장은 822년에 “맥주 양조용 홉을 수확해 수도원에 헌납하는 것은 지역 주민들의 중요한 의무이다”라고 기록했다. 그 이후 약 300년 동안 맥주에 홉을 사용했다는 다른 기록은 없다. 따라서 당시 맥주 양조에 홉을 사용한 것이 보편적이었는지, 이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홉을 사용하는 방법이 알려진 이후에도 홉 보급은 천천히 퍼져나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코르비 수도원의 기록 이후 홉이 문서에 다시 등장한 것은 300여 년이 지난 뒤다. 12세기 독일 라인란트에 위치한 베네딕트 수도회의 원장이었던 힐데가르트 수녀가 자연주의 치료법에 관한 저서 ‘자연학(Physica)’에서 맥주를 담글 때 그루이트 대신 홉을 사용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홉 사용은 맥주 역사에서 일대 전환점

지금은 맥주에 홉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홉이 들어가지 않은 맥주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만큼 홉은 맥주를 만드는 데 중요한 재료다. 홉의 향이 맥주에 특유의 개성을 부여한 것과 더불어 홉은 맥주 보존성을 높였기에, 홉 사용은 맥주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루이트도 맥주에 쓴맛을 내고 보존성을 높였다. 하지만 홉과 같은 뛰어난 보존성을 주지는 못했기에 각 가정에서 조금씩 맥주를 만들어 마셨고 다른 곳에 유통시키지는 못했다. 홉을 사용하지 않고 맥주를 오래 보관하려면 알코올 도수를 높이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는 맥주를 양조할 때 들어가는 보리 몰트 양을 늘려야했기에 경제적 방법이 아니었다. 따라서 홉을 넣기 시작한 것은 맥주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맥주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주로 가족 단위로 만들어 마시던 맥주는 13세기에 들어서며 독일에서 홉 사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고 14~15세기에 수도원 양조장에서 대량으로 맥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점차 산업으로 발돋움했다. 수도원에서 만드는 맥주와 더불어 각 지역 펍에서 맥주를 만들어 팔면서 맥주 양조는 가정을 벗어나 규모가 큰 양조장으로 발전했다. 홉 사용으로 맥주 보존기간이 늘고 다른 지역으로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맥주는 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홉과 비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

홉을 사용한 맥주 양조법은 13세기에 보헤미아 지역에서 완성됐다. 이 지역은 지금도 뛰어난 품질의 홉 생산지로 유명하다. 곧이어 독일에서 표준화된 맥주 양조법을 만들고 대량생산과 수출을 시작했다. 각 가정에서 소규모로 만들던 맥주를 10명 정도의 중간 규모 양조장에서 생산하게 됐다. 중간 규모 맥주 양조장은 14세기에 네덜란드와 플랑드르로 퍼져나갔고 15세기에 영국까지 퍼지게 됐다.

홉을 사용하기 전에 영국에서는 맥주를 몰트와 물로만 만들었다. 이런 전통적 맥주를 에일(Ale)이라 통칭했으며, 홉을 사용한 맥주가 등장하면서 에일과 구별하기 위해 비어(Beer)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전통적 맥주는 에일, 홉을 넣은 맥주는 비어라 불렀다. 영국에서는 처음에 홉을 사용하는 것에 부정적이었지만, 곧 보편화됐다. 16세기 이후에는 영국의 모든 맥주에 홉을 사용했다.

영국은 1710년에 수입 홉에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홉이 중요한 작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홉 사용이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서 홉을 사용한 맥주를 지칭하기 위해 도입한 단어인 비어는 차츰 맥주를 통칭하는 단어가 됐으며, 홉을 사용하지 않은 맥주를 지칭하던 에일은 도수가 높은 맥주를 의미하게 됐다. 원래 맥주를 의미하던 에일이 비어로 대체된 것이다. 크래프트 맥주가 인기를 얻게 된 후 에일은 상면발효 맥주를 통칭하지만, 여전히 모든 맥주를 통칭하는 단어는 비어이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고 주인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 전영우는 오랜 동안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금은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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