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는 신성한 공간, 문학산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는 신성한 공간, 문학산
  • 천영기 시민기자
  • 승인 2019.06.2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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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천영기의 인천달빛기행
3. 문학산 일대를 찾아서(하)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한국고고인류연구소가 2016년에 발굴한 문학산 제사유적.(사진제공ㆍ한국고고학인류연구소)
한국고고인류연구소가 2016년에 발굴한 문학산 제사유적.(사진제공ㆍ한국고고학인류연구소)

문학산 제사유적으로

사모지고개. 청학동으로 내려가는 길.
사모지고개. 청학동으로 내려가는 길.

나무다리가 끝나는 곳, 문학산 정상에서 서문 쪽 나무계단으로 내려가면 사모지고개로 내려가는 등산로다. 등산로에 돌이 많아 밤에는 손전등을 가져가야한다. 300m쯤 내려가면 문학산 제사유적을 만날 수 있다.

한국고고인류연구소가 2016년 5월부터 7월까지 유적 발굴조사를 하기 전에 이곳은 등산로에 있던 자그마한 둔덕이었다. 겨울이나 초봄에 이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앞이 탁 트여 바로 한나루(대진나루)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둔덕 아래에서 보면 큰 바위 위에 바위 대여섯 개가 세로로 촘촘하게 세워져 있어 인위적으로 배열해놓은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혹시 무당이 굿을 하던 곳이 아닐까?’ 하며 무심코 지나갔던 곳이다.

그런데 발굴조사에서 기와지붕을 가진 사각형 제단시설 터가 발견됐고 청동기 시대 간 돌 화살촉(마제석촉) 3점과 통일신라 기와 편 50점, 토기 20점, 고려 시대 명문기와 청자 각 2점 등 유물 총100여 점이 함께 출토됐다. 이 유물들을 볼 때 상당히 오랜 기간 제사 터로 이용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유적은 주민 거주지역이나 산성과는 동떨어져있으며, 사모지고개를 거쳐 능허대와 한나루로 가는 길을 마주하고 있다. 유물을 고의적으로 깨뜨린 양상이나 잔과 같은 특정 기종의 유물이 집중 출토된 것으로 보아 풍어제나 배에 탄 사람들의 안녕을 빌기 위한 제사유적으로 추정된다. 혹시 백제 때 사신의 무사안전을 기원했던 제단은 아닐까. 배를 타고 떠나는 사신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나루에서 관원과 백성들이 손을 흔들고 이곳 제사유적에서 만신이 징을 치며 너울너울 춤추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1600여 년의 시공을 넘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사모지고개로

문학산 제사유적에서 계속 길을 내려가면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 고갯마루에 다다르는데, 이곳이 여러 가지 전설이 얽혀 있는 사모지고개(三呼峴, 삼호현)다. 「여지도서」에는 삼해주현(三亥酒峴)이라 적혀있다. 사모지고개는 문학동과 청학동을 잇는 고개다. 청학동으로 가는 넓은 도로를 만들면서 비탈 흙을 깎아 메워 둥글 번번한 마루턱이 됐으나, 옛날에는 좁고 잘록한 고개였다. 전설 중 삼호현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600여 년 전 중국으로 가던 백제 사신들은 서울에서 부평을 거쳐 비루고개(別離峴, 별리현)를 넘었다. 그리고 경신역(현 남동구 수산동)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한나루에서 배를 탔다. 이때 사신을 배웅하러온 가족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별리현에서 이별했다. 사신들도 이 삼호현에 이르러 저 멀리 보이는 별리현에 서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별을 안타까워했다. 사신 일행은 “잘 있거라, 그동안 잘 있거라. 다녀올게, 잘 있거라.” 하며 이별 소리를 세 번 크게 외치면서 이 고개를 넘었다. 이런 까닭에 삼호현이라 일컬었다.

중바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짚으면 머리가 구멍에 들어간다.
중바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짚으면 머리가 구멍에 들어간다.

중바위인가, 남근석인가

사모지고개를 넘어 청학동 쪽으로 30m가량 내려가면 왼쪽 벼랑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를 술이 나오는 바위(중바위)라 한다. 나와 지인들이 1990년에 향토교육연구회를 만들고 답사할 때 중바위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사람도, 중바위로 가는 길도 없었다. 나무와 풀이 우거져 길은 사라졌으며, 밑에서 올려보아도 중바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확인해야 했기에 겁 없이 벼랑 같은 바위를 잡고 겨우 올랐다. 그리고 매해 학생 수백 명을 안내해 다니다보니 저절로 작은 길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지금도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 사람들이 쉽게 찾아갈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 바위에는 지금도 움푹 파인 두 무릎 자국과 두 손 자국 외에 머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다. 이 바위를 ‘효자바위’라고도 하는데, 스님이 효자로 바뀌었을 뿐 구성이 같기에 대표적으로 알려진 중바위 이야기를 소개한다.

옛날 청학동에 사는 스님이 시주를 하러 학익동으로 가기 위해 매일 이 고개를 넘어 다녔는데, 어느 날 목이 말라 물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어여쁜 여인이 술잔을 받쳐 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여인은 스님에게 술 석 잔을 공손히 바치고는 사라져버렸다. 그 일은 매일 반복됐다. 그러다 어느 매우 무더운 여름날 갈증을 이기지 못한 스님은 여인에게 술 석 잔을 받아 마시고도 성에 차지 않자 한 잔만 더 줄 수 없냐고 했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바위 뒤로 사라졌고 다시는 술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은 여인이 사라진 바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로 바위를 받으며 “술 한 잔만 더 주오, 주오.”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때 머리로 받은 자리에 구멍이 생겼고 무릎 자국과 손자국이 뚜렷이 새겨졌다. 욕심을 경계하라는 설화다.

그런데 내가 대표로 있는 학산포럼 향토사 연구팀에서 2016년에 중바위와 그 주변 지역을 세 차례에 걸쳐 탐사한 결과, 제의(祭儀)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는 특징을 발견했다. 높이 2.7m인 중바위 뒤쪽에서 보면 중 바위가 남근(男根) 모양이다. 그리고 주변에 우물터로 추정되는 돌무지와 신성한 제의 공간 경계선으로 보이는 선돌이 있다. 아들을 얻고자 기원하는 바위인 ‘기자암(祈子巖)’을 중심으로 한 제의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도자료를 내어 전문가의 현장조사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는데, 빠른 시일 안에 발굴조사가 이뤄지길 바란다.

중바위를 뒤쪽에서 보면 남근(男根) 모양이다. 주변은 기자(祈子)제의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바위를 뒤쪽에서 보면 남근(男根) 모양이다. 주변은 기자(祈子)제의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갑옷바위와 주변의 거대한 돌들

갑옷바위는 사모지고개를 넘어 중바위와 마주보는 길 오른편 청량산 비탈에 있다. 그 옆에는 무덤들이 있어 찾기가 쉽다. 이 바위는 그리 크지 않으나 상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가까이 가서 보면 윗돌이 세로로 길게 금이 간 것을 알 수 있다. 흡사 뚜껑을 닫아놓은 ‘돌함’ 모습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장수가 이 바위 아랫부분에 돌함을 파고 자기 갑옷과 투구를 감춘 다음 그 위에 뚜껑바위를 덮어놓았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바위를 건드리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 죽었다. 그런데 한 번은 문학산 꼭대기에 있는 안관당 지기가 이 바위를 깨뜨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나 확인할 작정으로 뚜껑바위 아래쪽을 망치로 쳐 깨뜨렸다. 그러자 정말 청천벽력이 치고 천지가 진동해 당지기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갔다.

예전에 이 갑옷바위 주변에는 커다란 돌 7~8개가 흩어져있어 혹시 이곳이 지석묘군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돌을 건드리면 재앙이 있을 것이라는 전설이 있는 데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 정도 크기의 돌들이 있을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 큰 돌들이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묘역을 조성하며 옆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도 중바위와 함께 발굴조사가 필요한 것 같다.

비류가 건국의 기틀을 잡은 문학산을 중심으로 미추왕릉, 비류정, 배바위 설화, 제사유적, 중바위(남근석), 갑옷바위,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지 않았지만 사모지고개 너머 청학동 흔들못의 용마 설화 등을 종합해보면 문학산은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는 신성한 공간임이 분명하다. 이런 신화소(神話素)들을 종합하면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갑옷바위. 상부 바위는 세로로 금이 가있다.
갑옷바위. 상부 바위는 세로로 금이 가있다.

학산서원(鶴山書院) 터

학산서원은 숙종 28년(1702) 이정빈 등이 학문과 교화에 힘을 썼던 인천부사 정관재 이단상을 추모하는 서원을 건립하고자 국왕에게 상소해 왕의 허락으로 숙종 34년(1708)에 건립됐다. 건립과 동시에 정일빈 등이 사액을 청해 인천의 유일한 사액 서원(국가의 공인을 받아 왕으로부터 서원 이름 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하사받은 서원)이 됐다. 영조 2년(1726)에는 선정을 펼친 그의 아들 이희조를 추가 배향했다.

학산서원 터는 사모지고개에서 문학동 쪽으로 내려오다 고물상들이 있는 작은 길로 끝까지 내려가면 왼편에 위치하고 있다.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 조사에서 ‘학산서원(鶴山書院)’이라 새겨진 와편이 발견됐고 그 주변에서 재실과 강당, 사당 건물 초석이 확인됐다. 그러나 도시 확장과 함께 다시 유실됐고 그 이후 문학산터널공사로 인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됐다. 인천시립박물관 협조로 그 위치를 추적해 2004년에 미추홀구와 학산문화원이 표지석을 세웠다.

2009년부터 문학산 지킴이 ‘도토리’ 회원과 문학동 두리지역복지센터 직원, 자원봉사자들이 그 터를 닦고 나무와 꽃을 심어 가꾸고 있으며, 서원 터에서 나온 돌들을 모아 돌담을 쌓았다. 문학터널 공사 전에는 이곳에 공장이 있었고 돌로 만든 표지석이 옆에 있었다. 현재 미추홀구에서는 학산서원을 복원해 학생과 시민들에게 선정을 베푼 이 부자를 기리고 체험학습 공간으로 사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돌담을 따라 공동묘지를 넘으면 연경산 입구에 있는 배드민턴장으로 내려갈 수 있다.

학산서원 터에 쌓은 돌담.
학산서원 터에 쌓은 돌담.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달빛기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