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 은행나무 | 2019.5.27.

[인천투데이 이권우 도서평론가] 지금까지 알려진 신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길가메시 서사시’다. 이 신화의 주제는 간단명료하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류 최초의 열망은 불멸에 대한 꿈이다.

그런데 인류 최초의 각성은 필멸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껏 인류 최초의 열망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장수나 영생의 꿈은 오랫동안 종교에 의지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의학에 기대어 그 열망을 이루고자한다.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인간강화’라며 이 점을 지적한 바도 있다.

정유정의 장편소설 <진이, 지니>를 사전 정보 없이 읽었다. 당황스러웠다. 전작에서 보여준 작풍과는 전혀 달랐다. 일종의 옴니버스라 파트별로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주인공이 바뀌었다.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야기 얼개가 특이했다. 말하자면 판타지라고 해야 하나, 여자 주인공 진이의 영혼과 보노보 지니의 육체가 결합했다는 설정이다. 황당하다 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영화나 드라마나 판타지적 특성을 워낙 많이 활용하니, 큰 거부감은 없을 터다. 단지 스릴러 풍의 작품을 써온 작가가 판타지 풍으로 써서 당혹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진이, 지니>를 읽으면서 나는 예의 ‘길가메시 서사시’를 떠올렸다. 죽고 싶지 않은 열망이야말로 가장 원초적 욕망일 테다. 원초적이라는 낱말은 ‘제어 할 수 없는’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이성이나 논리가 끼어들 수 없다. 그러니 적나라 할 수밖에 없다. 부잣집 별장에 갇혀있던 지니는 불이 나 위험에 놓여 있다 우여곡절 끝에 사로잡혀 연구소로 가게 됐다.

영장류 센터의 장 교수와 진이가 지니를 붙잡아 돌아가다 교통사고가 났다. 진이는 치명적 상처를 입어 몸은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 있는데, 영혼은 지니에게 덧씌워 있다. 그렇다고 지니가 늘 진이인 것은 아니다. 오락가락하니 어느 때는 지니의 시간이, 어느 때는 진이의 시간이었다. 이 믿기지 않는 일을 지켜보는 이가 있으니 김민주. 예스럽게 표현하면, 출사에 실패해 집안에서 버림받은 방랑자다.

내가 이 작품을 보며 중요하게 여긴 것은 지니에 덧씌워진 대로 삶을 연장하는 방법을 진이가 끝까지 택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불멸의 열망이야말로 가장 먼저 있었던 욕망이라 하지 않았던가. 진이 역시 이 점을 놓고 고민한다. 물론, 자신의 육체가 멀쩡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돌아가려했을 터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몸은 가망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살려면 지니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만다.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떤 길을 택할까?

작품을 읽고 나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았다. 느낌에, 작가가 최근에 가장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지켜본 게 아닌가 싶었다. 더 함께 하고 싶은 열망, 그러나 결코 그리할 수 없는 현실을 겪으며 안타까웠던 마음이 이 소설을 쓰게 한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 그런데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예상한대로 가장 사랑했던 이, 즉 작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과 이 작품은 연결돼있었다. 틀린 것은 그 죽음이 무려 30년이 넘었다는 점이다. 간호사 시절 중환자실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경험이 이 작품을 쓰게 한 힘이었던 모양이다. 엉뚱할지 모르겠지만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이 자꾸 떠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 독자 가운데 작품 완성도에 대해 얼마든지 이견을 낼 법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으로 죽음을 주제로 한 깊은 토론이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엉뚱할지 모르지만 필멸해야 다음 세대의 삶이 가능한 법이다. 상상해보라, 모두 불멸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생각에 이르면 나라는 존재는 홀로 떨어져 있지 않고 그 어떤 맥락에 놓이게 된다. 앞선 세대의 죽음 없이 오늘의 내가 가능하지 않았다. 뭇 생명이 다른 생명을 위할 적에 가치 있는 생명이 되는 법이다. 어쩌면 진이는 행운아인지 모른다. 그녀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놓고 무려 사흘이나 전 존재를 걸고 고민할 수 있었잖은가. 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이 작품이 그 고민을 미리 해보게 해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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