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나는 할머니와 추억이 많지 않다. 한 분은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90세를 훌쩍 넘겨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몇 번 뵌 적이 없다. 그래서 내겐 책이나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할머니 모습이 그들 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체로 힘이 없고 세상에 비관적이고 도시생활에 서툴렀다. 잔소리와 아픈 데가 많으며 작은 것에 집착하고 고집스럽다. 때론 인자하고 인심 좋은 할머니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들에게 그리움은커녕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올해 일흔이 되면서 내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나와 똑같았던 엄마 키가 어느새 반 뼘은 줄어 있었고 목소리도 점점 얇아졌다. 올라가는 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동네 낮은 산도 무릎이 아파 갈 수 없다고 했다. 일 년에 감기 한 번 걸리지 않는 ‘강골’ 체력이었기에 엄마의 몸이 약해진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내 인생 최초의 ‘할머니’가 된 엄마를 하루라도 빨리 인정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도, 엄마 노년생활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엄마가 너무 빨리 늙어버리는 건 아닌지 조바심을 내는 나와 달리 엄마는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마음 편하다고 한다. “끼니 챙겨야할 사람 없지, 내가 뭘 하든 아무도 참견할 사람 없지, 자식들은 각자 잘 살지, 전화 주고받고 가끔 만나는 친구도 있지, 뭐 큰돈 없어도 그냥 안 굶고 살면 된 거지.” 가장 좋은 건 앞으로 뭔가 해야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진 것이다. “늬들 공부시키는 거, 집 사는 거, 시집장가 보내는 거, 뭐 그런 게 다 사라지고 이제 내 몸 하나 편히 살 일만 남았잖아.”

내가 봐도 엄마 얼굴이 확 피었다. 가끔 마감에 쫓겨 불안할 때면 세상 바쁠 일 없고 느긋한 엄마가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가 내 나이일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기에, 부러운 맘을 접는다.

내 미래이자 엄마의 현재인 여성 노년의 삶에 점점 관심이 간다. 때맞춰, 최근 이들이 주인공인 책들이 출간됐다. 나온 지 보름 만에 3쇄를 찍은 유튜브 스타 박막례 할머니의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이제 막 세상에 나와 따끈따끈한, 여섯 할머니의 생애구술사 ‘할매의 탄생’, 아흔일곱 살 할머니의 일기를 모아 지난해 큰 화제가 된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읽어보았다.

책에 등장한 할머니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했고 고된 노동으로 일생을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배움의 열망을 삭힌 채 겨우겨우 한글을 떼 가며 닥치는 대로 일해 온 굽이진 삶에 한숨과 눈물이 나오다가도, 자신 삶의 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가꾸며 살아온 것에 축하와 존경의 박수를 치게 된다. 거짓 없는 진짜 삶의 역사가 담긴 이런 책을 왜 교과서로 사용하지 않는 건지, 국민청원이라도 해볼까 싶다.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 박막례, 김유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펴냄

언젠가 친구가 내게 동영상 주소를 메시지로 보냈다. 영상 속에는 진한 화장을 한입담 거친 할머니가 비빔국수를 아주 대충 만들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손녀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며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는 그 영상은 재밌기도 하고 툭툭 던지는 말에서 찡한 감동도 느꼈다. 단번에 반한 나는 곧바로 채널 구독 버튼을 눌렀다.

그는 박막례, 1947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셋이다. 요즘 ‘핵인싸’(무리 속에서 아주 잘 지내는 사람)들만 한다는 유튜브 판에서 구독자 93만 명을 모은 보기 드문 ‘70대 유튜버’다. 초등학생도, 또래 노인들도 그의 영상을 즐겨본다. 어딜 가든 그를 알아보는 사람 천지다. 그와 손녀딸 김유라 피디가 함께 책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를 썼다.

그는 2년 반 전만 해도 용인에서 쌈밥집 식당을 운영하는 평범한 할머니였다. 그가 병원에서 치매 위험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유라 씨가 사표를 내고 호주로 단둘이 여행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어떤 생각에 단단히 미쳐있었다. 우리 불쌍한 할머니,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57쪽)

유라 씨가 큰 결단을 내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박막례는 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여자가 글을 알면 결혼해서도 집을 나간다”는 아버지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글은 못 배웠어도 집안에서는 내가 제일로 바빴다. 아침에 일어나 나무를 하고, 키우던 소들 깔비(여물 주기)하고 새참을 날랐다가 또 나무를 하고 (중략) 그러다가도 염병할, 사람을 써서 농사일을 할 정도로 집이 잘 사는데 딸이라고 글을 가르쳐주지 않는 아부지가 너무 미웠다.”(12쪽)

친구 소개로 만난 가난한 남편은 바람둥이에 생활력이 없었다. 집 나간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총각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소식에 뒤돌아서 눈물을 쏟은 날, 그는 “나는… 그날 속이 다 들어버렸어. 그냥 철이 다 들어버렸어. 지금도 그 속이 그대로다.”(22쪽)라고 털어놨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그는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작은 식당을 열고 43년 동안, 유튜브 스타가 된 뒤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늦은 저녁까지 일했다. 그의 가게 자리에 도로가 뚫리면서, 일흔일곱 살까지 하려던 식당을 5년이나 일찍 접게 됐다. 그리고 본격적인 유튜버가 됐다.

이 책에는 그가 살아온 이야기가 나이대별로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그리고 그의 인생 대 반전을 만들어준 유튜브 이야기가 이어진다. 구글의 초대장을 받아 미국에 가서 구글 회장을 직접 만난 최근 이야기까지 실려있다.

스위스에서 난생처음 패러글라이딩을 탄 그는 말한다. “무서울 때마다 ‘아, 죽으면 죽는 거지 뭐’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더라.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고? 나는 70년을 살았으니까 재미없게 오~래 사는 것보다 남은 생 재미있게 살다가 죽어도 아쉬울 거 없을 나이거든(물론 유튜브를 만나고 나선 이 좋은 세상 더 오래오래 살고 싶어졌다).”(207쪽)

그의 ‘편(그는 팬을 편이라고 발음한다)’들도 그가 오래오래 살길 바랄 것이다. 참고로, 표지사진에 대해 박막례 할머니는 유튜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거 진짜 내 팔 근육이야. 쌀 들어 날리고 설거지하고 이 근육이야. 엿 장사 꽃 장사 떡 장사 파출부… 내가 살아왔던 삶을… 여기 다 들어 있다.” 이 책을 잘 보이는 곳에 꽂아 두고 ‘아 정말 힘들어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러운 날 펼쳐 읽을 생각이다.

할매의 탄생 | 최현숙 지음 | 글항아리 펴냄

‘할배의 탄생’을 쓴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가 펴낸 최신작. 이번엔 ‘할매의 탄생’이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2리에 사는 여섯 할머니 이야기가 입말 그대로 실려 있다. 경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도 이 산골짜기 사투리 앞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몇 장 소리 내 읽다 보면 ‘읽는 맛’을 이보다 더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 없다. 할머니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책장을 덮기가 아쉬울 정도.

“전에는 팔남매 동기들 모이가 밥 묵을라 카마, 마 저리 받히고 이리 비잡고, 부썩 앞에 쪼그려 앉아가 묵고. 이 집 성씨들이 많고 밥을 한 데 묵을라 카이 만날 부썩 앞에 이래, 부썩 카먼 압니꺼? 불 때는 부썩. (아, 부엌 아궁이요.) 다 아네 뭐. 서울 슨상이 워예 그래 잘 압니꺼, 하하하.”(48쪽)

70, 80년 차곡차곡 쌓인 인생에서 낯선 저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저마다 중요하고 각별한 기억일 수밖에 없다. 슬프고 힘든 이야기를 꺼내놓다가도 이내 ‘하하하’ 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걸 보면 세월이 지날수록 웃음과 눈물은 그만큼 가까워지는 건가 싶다.

“내 이 얘기는 하고 죽을란다. 결국에는 내 숭이고 집안 숭이라도, 이 얘기를 안 하마 내 얘기가 아이다 싶다. 그래가 했다. 죽은 엄마, 아부지헌테는 더 물을라도 물을 수가 없고, 내가 동생들 욕하고 싶어도 여에다 이 얘기를 하겠노? 즈그들은 듣기 싫을 거라. 그래도 내 마음이 어떻다는 거를 좀 알아돌라 이거라. 겉이 앉아가 말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이 말을 할 거 아이가? 그걸 몬하는 기라. 엄마 있일 때는 엄마가 가로막아가 몬했고, 오매 가고는 동상들이 내 말을 들을라꼬를 안 해가 몬했어. 그라이 내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라.” (303쪽)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내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생애이야기를 어떻게 견디며 듣느냐고 묻는다. 혹은 구술생애사는 고통의 전시가 아니냐고도 묻는다. (중략) 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기껏해야 고난을 살아낸 사람들 속에 이미 있는 힘과 흥을 봐내는 것이다. 세상의 온갖 정상 이데올로기로 인한 자괴와 낙인을 거둬내고, 그들 안에 기필코 있는 힘과 흥을 함께 끄집어내서 한바탕 즐기는 일이다.”

여섯 할매 이야기는 머리맡에 두고서 밤마다 자기 전에 읽어야겠다. 내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생각하면서.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이옥남 지음 | 양철북 펴냄

1922년생 이옥남 할머니가 30년이 넘게 쓴 일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할머니는 어려서 글을 배우고 싶었지만, 아버지 반대로 배우지 못했다. “부엌에 불 때면서 부주깽이로 재 글어내서 재 우에 가자 써보고 나자 써보고” 이렇게 배운 글씨를 환갑이 넘어 좀 예쁘게 써 볼까 하고 날마다 일하고 집에 돌아와 일기를 썼다 한다. 그가 날마다 마주치는 이웃과 자연, 생명, 일상이 아름다운 시구처럼 읽힌다.

“젊었을 때는 봄이 되면 잠이 나빠서 언제나 잠 좀 실컷 자보느냐고 했드니 나이가 드니 아무리 잘려 해도 잠은 오지 않고 잡념만 생기는구나. 밭에는 모든 풀들이 때를 찾아 시간을 다투면서 파릇파릇 세상 밖에 나오느라고 바쁘건만.”(22쪽)

“작은딸이 간 뒤에 보니 전화기 밑에 돈 오만 원 넣어놓고 초코파이 한 박스와 사탕 두 봉과 두유 한 박스가 있다. 돈을 엄청나게 쓰고 갔네. 사위는 오징어 삶언 것을 가져와서 딸이 썰어서 주고 갔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저녁이 되니 눈에 솜솜한 것이 그저 섭섭한 마음 간절하구나. 바나나와 사과 참외와 그득 사다놓고 갔구나. 그러니 딸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부러울까.”(97쪽)

이 책은 식탁 근처에 두고 누군가 막연히 그리운 날, 외로운 날 펼쳐 읽으려한다. 100여 년을 살아낸 할머니의 담담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볼 생각이다.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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