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45>
‘왕 중 왕의 도시’ 페르세폴리스

신화 속 동물인 라마수가 조각된 ‘만국의 문’.

[인천투데이 허우범 시민기자] 이란 여행 중 가장 기대되는 날이 밝았다. 동방문명의 종주이자 페르시아 제국의 영화가 서린 페르세폴리스를 보는 날이다. 시내 한복판부터 이 도시가 고대 다리우스 대제의 왕국이었음을 알리는 각종 홍보벽화가 눈에 띤다. 또한 세계적 관광명소답게 이른 아침부터 도로변 푸른 잔디에 물을 주는 사람들이 이색적이다.

페르세폴리스로 향하는 입구는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직선 도로다. 이는 높다란 석주(石柱)와 웅장한 궁전 터가 멀리서도 잘 보이게 해 고대 페르시아 위용(威容)을 각인(刻印)시키려는 뜻이다.

페르세폴리스 전경.

아케메네스 제국과 다리우스 대왕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6세기 초에 즉위한 다리우스 1세가 내란을 진압하고 나서 건설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새로운 수도다.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의 도시’란 뜻이지만 그 어원은 ‘파르사(Parsa)’에서 왔다. 페르시아 제국의 출발이 파르스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란인들은 이곳을 ‘타흐트에 잠시드’라고 부른다. ‘왕의 옥좌’라는 의미인데, 이는 다리우스 대왕과 관계가 있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토는 이집트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거대했다. 제국 통치자는 ‘왕 중 왕’으로 불렸다. 대왕은 거대한 영토와 많은 민족을 통치해야했기에 제국 전 지역을 주(州) 20개로 나누고 각기 총독(사트라프)을 임명해 다스리게 했다. 총독은 왕족과 귀족이었으며, 행정ㆍ사법ㆍ재정 등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위임받았다.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1세 때부터 그의 손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까지 50년에 걸쳐 완성됐다. 이 도시는 라흐마트산을 등진 채 높이 12미터의 인공 터를 조성하고 그 위에 12만8000제곱미터의 왕국을 건설했다. 페르세폴리스는 ‘왕 중 왕의 도시’였던 것이다. 제국의 수도는 ‘수사’였지만 다리우스는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고 바빌론이 아닌 이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각국에서 온 사절단을 맞았던 알현전 ‘아파다나’.

폐허 위에 기둥만 남았지만···

하지만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도시는 불타고 보물은 약탈당했다. 페르시아가 다시는 부흥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을 보면, 그들은 노새 2만 마리와 낙타 5000마리에 보물을 실어갔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금은보화를 약탈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왕궁은 출입문인 ‘만국의 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높이 10미터가량 되는 돌기둥에는 목우상(牧牛像)과 사람 얼굴에 날개가 돋친 수인상(獸人像)이 우뚝서있다. 이어서 이곳 상징과도 같은 사자 몸에 독수리 얼굴인 그리핀상이 길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다리우스 대제 시절을 회상하며 무너진 석주 사이를 거닌다. 세계적 관광지라서 그런지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많다. 대부분은 유럽인들인데, 중국인도 얼핏 보인다. 아마도 이란을 여행하면서 가장 많은 외국인을 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일 것이다.

사막 열풍이 세차게 몰아친다. 순간, 폐허는 온통 먼지투성이다. 하지만 그뿐, 누구도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폐허 위에 우뚝우뚝 선 열주와 석상이 내뿜는 강렬함에 빠져 흙바람쯤은 안중에도 없다. 폐허의 도시가 아우르는 향기가 이 정도니 전성기의 페르세폴리스는 과연 얼마나 강렬했을까?

이제 페르세폴리스는 폐허 위에 기둥만 남았지만, 가지런한 열주(列柱)와 각종 석상에서 뿜어 나오는 위용은 아직도 2500년 전 왕궁의 위세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아파다나 궁전 터 계단에 새겨진 28개국 조공행렬도는 이곳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고 출발지였음에 이의를 달 수 없게 한다.

알현전 기단에 새겨진 각국 조공사절단 모습.
기둥 100개 받침만 남은 옥좌전 터.

‘테르모필레 전투’와 영화 ‘300’

조공행렬도는 자국 진상품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신들을 표현해놓았는데 인물과 진상품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엘람 왕국은 사자를, 아시리아는 양과 직물을 바친다. 양들이 앞서가지 않는지 양의 등을 움켜쥐고 있다. 창을 움켜쥐고 있는 메디아 병사의 길쭉한 손톱까지 표현해놓았다. 섬세하고 정교한 오리엔트 미술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 또한, 조공행렬도를 보고 있노라면 6세기 동방 제국의 위세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하다.

오래 전에 상영돼 전 세계에서 흥행을 기록했다는 영화 ‘300’은 바로 이곳 황제인 크세르크세스와 스파르타 결사대 간 전쟁을 그린 영화다. 기원전 480년,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의 ‘테르모필레 전투’를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현란한 컴퓨터그래픽과 만화적 상상력을 활용해 웅장한 판타지를 완성했다.

이 영화 주인공은 서구적 관점에 입각한 ‘스파르탄의 영웅들’이다. 페르시아 대군을 막을 수 있는 협곡을 장악한 스파르타 결사대 300인은 잔악한 크세르크세스왕에 대항해 승리를 거듭한다. 영화 속 스파르타 결사대는 모두 용감한 영웅이고, 페르시아 군은 모두 비정상적 군인일 뿐이다. 더구나 특수부대인 ‘임모탈’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나 다름없다.

서양 우월주의에 충실한 이 영화의 비약은 너무 심해 마치 애니메이션 만화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만화라고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가. ‘삼국지연의’가 소설임을 주장하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중화주의사상의 맹목적 흡수가 무서운 것과 마찬가지다. 서구의 퇴폐적인 문화로부터 자국민 보호를 주창(主唱)하는 이란 정부가 이 영화 상영을 금지한 것은 지당한 일일 것이다.

페르세폴리스의 주인공 ‘다리우스 1세’상.

조공행렬도를 감상하며 페르시아 제국을 회상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청년이 나를 가리키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해 쳐다보니 비켜서라는 손짓을 한다. 방송용 카메라를 든 감독과 배우인 듯한 여인들이 보인다. 드라마 녹화를 하려는 참이었다. 하는 수없이 자리를 이동했다.

조금 지나자 다시 비켜서란다. 아니, 넓은 공간에 하필 나만 쫓아다니는가. 더운 날씨에 짜증이 약간 겹친다. 사전에 아무런 안내도 없어서인지 같이 비켜선 내국인들도 웅성거린다. 빠르게 훑어보고 마지막 장소로 이동했다. ‘이젠 느긋하게 살펴보자’며 무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방송 카메라가 다시 내 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 참, 오늘은 카메라까지 성가시게 하는구나.

※ 허우범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곳곳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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