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6)
[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6)
  • 김갑봉 기자
  • 승인 2019.06.1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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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면 관교리 최선택 지사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문학면 관교리 독립만세운동은 3월 27일 횃불시위

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2권 3ㆍ1운동사(상) 제3장 경기 서부지방 부천군 편을 보면 문학면(文鶴面) 관교리(官校里)에서 3월 27일 밤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시위가 일어났다.

부천군 문학면 관교리는 현재 인천 미추홀구 관교동이다. 지명 ‘부천군’은 일제가 구한말 지명인 부평군에서 ‘부’를 따고, 인천부에서 ‘천’을 따와 만들었다. 현재 인천 중구와 강화군을 제외한 나머지 인천 전체와 부천시가 부천군에 속했다. 일제는 현 중구 일대를 인천부로 했으며, 강화군은 그 때도 강화군이었다.

당시 관교리는 부천군청이 소재한 부천군의 중심지였고, 관교리 이보경(李輔卿)ㆍ이무경(李武卿)ㆍ오주선(吳周善)ㆍ최선택(崔善澤)ㆍ이창범(李昌範)ㆍ이재경(李載卿)ㆍ이상태(李相台)ㆍ최개성(崔開城) 등이 주동해 군민 240여 명이 횃불시위를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최선택 지사.
최선택 지사.
최선택 지사 조서.
최선택 지사 조서.

일제, ‘정치변혁ㆍ치안방해’ 보안법 적용

관교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8명은 모두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최선택 지사 등 8명에게 징역 6월을 선고했다.

1심은 조선총독부 검사 경장삼랑(境長三郞)의 간여로 진행됐다. 1심 판결문을 보면, 일제는 “피고는 3월 27일 밤 거주지 마을에서 조선(대한) 독립 시위운동을 위하여 모인 다수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 정치변혁 목적으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동으로 치안을 방해했다”며 보안법 위반을 적용했다. 증거는 조선총독부 경찰과 검찰의 신문조서와 8명의 자백이라고 했다.

8명 중 최개성 선생을 제외한 최선택 지사 등 7명은 징역형이 부당하다고 항소했으나 일제는 기각했다. 경성복심법원 역시 상고를 기각했다. 일제가 보안법을 적용하기 위해 끝까지 적용한 혐의는 정치변혁 목적, 다수 군중 동원, 치안 방해 세 가지였다.

2심에서 일제는 “이창범은 대정 8년(1919년) 3월 1일 이후 조선 각지에서, 이보경ㆍ이무경ㆍ오주선ㆍ최선택ㆍ이재경ㆍ이상태는 3월 27일 밤 문학면에서 조선독립 시위운동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날 밤 함께 마을(관교리)에서 군중과 조선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며 시위운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일제, 관교리 최선택 지사 일상 감시

관교리 대한독립만세 운동 지도자 8명 중 일제가 일상적으로 감시한 인사를 정리해놓은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에 등장한 인물은 최선택 지사다.

최 지사는 1884년 9월 27일생으로 1919년 당시 36세였다. 일제 감시 인물카드에 본적과 출생지, 주소 모두 경기도 부천군 문학면 관교리 140번지로 나온다. 최 지사의 직업은 농업이며, 키는 161cm가량이다.

최 지사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1919년 5월 13일 1심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항소했으나 같은 해 7월 18일 2심에서 기각, 두 달 뒤 9월 29일 경성복심법원 기각으로 최종 징역 6월을 선고받고 기결수로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그 뒤 1920년 2월 28일 만기 출소했다.

2심 재판 때 일제는 최선택 지사에 대해 “경찰 신문조서 중에 ‘조선의 독립을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농업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만, 구한국(=조선)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고, 산에서 만세 소리가 들려 자신도 독립 만세를 부를 생각으로 갔다고 했고, 20~30명이 만세를 부르며 산을 내려오기에 자신은 올라가며 만세를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라며 다수 군중과 함께 치안을 방해해 보안법을 적용한 1심 판결을 그대로 적용했다.

“독립만세운동은 정치변혁 목적이기에 보안법 위반”

최선택 지사 등 7명은 2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 일제 판결문을 보면, 최 지사 등은 “독립만세운동은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하는 의사 발동이고 범죄가 아니다. 그러니 1심과 2심의 유죄 판결은 부당하고 위법하다”며 상고했다.

그러나 일제는 원심에 적용한 보안법 법리가 타당하다며 “상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때도 일제가 강조한 지점은 정치변혁 목적과 다수 군중 참여를 통한 치안방해 혐의였다.

일제가 보안법을 적용한 데 대해 최선택 지사 등의 변호를 맡은 백정승오(白井勝悟) 변호인은 “보안법은 정치적 치안방해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피고의 행위에 정치적 치안을 방해한 사실이 없어선 안 된다”라고 반박했다.

이어서 “원심 판결 기록을 보니 경찰 조서 중에 피고는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본래의 한국이라고 말하는 쪽이 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피고는 (또) 정치에 관해 하등의 목적 없이 단지 다중에 뇌동하여 만세를 부른 것이라고 했다. 이는 보안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피고는 구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데 이것만으로는 정치적 치안을 방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며 보안법 법리를 부당하게 적용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제는 최선택 지사 등이 “1919년 3월 각지에서 일어난 대한독립만세 시위운동의 취지에 동의하고 동일한 행동을 하려고 3월 27일 밤 관교리 마을에서 독립운동 시위를 위해 모여 함께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외치며 시위를 했고 다수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인 것은 정치변혁 목적을 갖고 치안을 방해한 것”이라며 기각했다.

[도움말ㆍ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