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 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프랑스 노장 감독 아녜스 바르다가 한 극장에서 강연을 한다. 1세기 가까이 살아온 삶의 이력만큼 길었던 바르다 감독의 영화 이야기는 영화사 100년을 아우르는 방대한 양과 그 세월 안의 격동적인 변화를 담아낸다. 강연 중간 감독이 언급한 영화의 푸티지가 삽입되며 다큐멘터리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영화 속의 영화’이자 ‘영화에 대한 영화’가 되어 관객을 사로잡는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올해 3월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난, 벨기에 태생의 프랑스 노장 감독이다. 원래 사진작가였던 그녀가 25세에 처음 만든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은 이전까지 영화에 문외한이었고 영화광도 아니었던 그녀에게 ‘누벨바그의 대모’라는, 평생을 따라 붙는 별칭을 안겨준다.

그 후에도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꾸준하게 창작활동을 해온 감독은 작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로 한국 관객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그녀 나이 88세에 만든 영화였다.

나 역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을 처음 접했고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 연세에 창작활동을 이어가는 패기도 멋졌고 백발을 빨갛게 염색한 바가지머리도 귀여웠지만, 무엇보다 노년의 예술가라면 당연시하던 ‘똥고집’ 하나 없이 젊은 예술가들과 협업하는 열린 태도가 감동이었다. 나도 저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그녀의 유작이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바르다 감독은 보란 듯이 작년 말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라는 새 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녀의 유작이 됐다. 아니, 평생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답게 영화로 유언장을 대신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영화 속 강연에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자신을 영화 세계로 이끈 것은 ‘영감’과 ‘창작’, 그리고 ‘공유’였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영감을 준 세상의 사건들, 사람들은 곧 영화를 만드는 행위로 옮겨졌으며, 그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과 만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또한 바르다 감독의 영화 제작과정 일부였다. 1960년대 초기작부터 21세기 후반부 작품에 이르도록 그녀는 이 고민을 놓지 않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바르다의 영화들을 거의 대부분 보지 못했지만 영화를 감상하는 데는 아무 무리가 없었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바르다 자신에 대한 자전적 영화이지만, 자서전류가 주는 나르시시즘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 주변 사람들 삶에서 ‘영감’을 얻었고, 그 삶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고정관념과 관습에 저항하며 ‘창작’했다. 그 결과물을 많은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찾는 것 역시 그녀가 영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과정이었다. 시대와 기술 변화에 옛것을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를 고수하기보다는 스스로 비평가가 됐고 늘 혁신했다.

강연과 과거 영화의 푸티지만으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가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영화인생이 매순간 진보하는 생명체였고, 그녀가 보여준 삶의 태도 역시 나이는 들어가지만 생각은 더욱 젊어지는 혁신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자전적 다큐멘터리 그 너머, 삶과 예술의 관계, 예술의 가치를 말하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모든 예술가, 창작자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한 교과서 같은 영화라 할 수 있다.

아니지. 예술가가 아니면 어떠랴. 삶이 곧 예술이라는 추상적 명제를 삶으로 보여준 감독이 우리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이영주는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이며, 평소 드로잉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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