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수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남들이 자랑하는 꼴만 봐서야 되겠는가?” 「동국여지승람」편찬에도 참여한 조선 전기 문신 유호인(?好仁, 1445∼1494)은 32세 때인 1476년(성종 7년) 가을 채수ㆍ허침ㆍ권건ㆍ 양희지ㆍ조위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됐다. 이들은 삼각산 장의사에서 책을 읽다가 다음해 늦은 봄에 개성 유람을 기약했다.

하지만 약속한 날짜에 유호인과 양희지는 갑자기 일이 생겨 같이 가지 못했다. 채수 등이 3월 14일부터 23일까지 열흘간 개성 유람을 마치고 돌아와 시 100여 편을 지었노라고 자랑하자, 유호인은 양희지에게 “저 친구들이 써가지고 온 것이 아주 많지만 어찌 모든 곳을 다 보았겠는가. 우리도 한가한 틈을 타 숙원을 풀어보세”라고 한 뒤, 한 달 정도 후에 개성 유람을 떠났다.

유호인 등이 개성을 유람지로 선택한 이유는 ‘송도가 왕 씨의 옛 도읍지로 경치가 아주 뛰어나고 풍속도 아직 옛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였다. 이들은 행장을 준비하면서 「사기」와 「전한서」ㆍ「후한서」 1부씩을 상자에 넣고 산행에 필요한 도구들도 챙겼다.

유호인ㆍ양희지ㆍ신종호와 승려 현열은 1477년(성종 8) 음력 4월 25일 서울 돈의문(서대문)을 출발해 파주를 지나 임진강을 건너 개성에 들어갔으며, 5월 7일 낙하(洛河, 임진강 하류)를 건너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12일간 개성부 유수 성임, 경력 임수경, 교수 방옥정의 도움을 받아가며 개성 일대를 두루 돌아다녔다.

이들은 개성 중심지에 있는 수창궁ㆍ경덕궁ㆍ연복사ㆍ만월대ㆍ화원ㆍ목청전ㆍ성균관 등 고려 주요 유적지뿐 아니라 개성 북쪽 송악산·성거산ㆍ천마산ㆍ오관산 주변 박연폭포 등 명승지와 사찰, 영안성ㆍ벽란도ㆍ현불사ㆍ감로사 등 개성 남ㆍ서쪽 예성강 주변 유적지, 태조 현릉과 공민왕ㆍ노국공주릉 등 고려 왕릉까지 폭넓게 돌아봤다. 승선 유람을 겸해 유호인이 이때 보고 들은 바를 남긴 것이 채수(蔡壽, 1449∼1515)의 유람기 제목과 같은 「유송도록(遊松都錄)」이다.

사현을 넘어 도착한 수창궁은 ‘빽빽하게 늘어섰던 전각들은 이미 사라져 남은 것이 없고 다만 후궁 한 채만 있는데, 지금 개성부의 의창(義倉)으로 사용하고 있다. 용머리 계단(현재 개성 성균관 대성전 앞 좌우 용머리 석상 중 서쪽 것이 원래 여기 있었음)과 꽃무늬 초석이 풀숲 사이에 묻혀 있다’고 적었다. 연복사에 갔을 때는 ‘가운데 우뚝 솟은 오층탑이 성문을 압도했는데, 그물망을 쳐놓은 오층탑 사각 모서리에 떨어지는 붉은 노을은 정말로 장관이었다’고 했다. 서쪽 연복사탑중창비를 언급하고 동쪽 능인전에 있는 커다란 불상 세 개에 대해서는 그곳 승려의 말을 빌려 ‘이 불상은 본래 화산(花山, 강화도 또는 강화 남산)에 있던 것인데 신돈이 나라 권력을 오로지 할 때 배로 옮겨 봉안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고려 태조 현릉에서는 ‘삼국을 통일’한 영웅의 인생무상을 회고했다.

유호인은 개성의 명승고적을 두루 방문했을 뿐 아니라 일정도 비교적 자세하게 남겼기에 그의 유람기는 조선 초기 개성의 경관을 그려보거나 역사인식이 어떠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채수의 유람기와 함께 이후 개성 유람기 지침서가 됐다. 우리도 이 책을 들고 하루빨리 개성을 유람할 날을 기대한다.(이 글은 박종진 교수의 「유송도록」 번역문과 숙명여대 개성사전을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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