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인천투데이] 드라마 ‘코민스키 메소드(The Kominsky Method)’에는 노먼과 샌디라는 두 노인이 나온다. 노먼은 아내가 죽고 난 뒤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방황한다. 그는 친구 샌디에게 이렇게 말한다.

“maybe life has no meaning, and the bestwe can hope for is…just being nice.(인생은 아무 의미 없나 봐, 우리가 기댈 데라곤 그저…호의뿐인 건가.)”

노먼은 세금을 체납한 친구에게 30만 달러를 조건 없이 빌려주고도 남을 재력가이다. 그의 아내는 비록 병사했으나 그와 한평생을 같이 한 유일무이한 인생 동반자였는데, 그런 사람을 만나 한 세월을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은 아닐 것이다. 그의 곁에는 비록 나잇값 못하고 사고를 치기는 해도 몇 십 년을 함께한 친구 샌디도 있다. 노먼 자신 역시 까칠하기는 해도 예의와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 늙었다. 이만하면 꽤 성공적인 인생 아닌가.

아쉬울 것 없는 부와 명예, 동반자와 친구, 그리고 지혜까지 어느 정도 갖춘 노먼이라는 캐릭터는 비교적 이상적인 노년의 모습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인생의 끝을 향해가며 겨우 내뱉은 말이 ‘호의’인 것이다.

사람은 상대방을 서로 신뢰하는 것으로 겨우 유지될 수 있는 생물체인지도 모른다. 노먼이 말하는 ‘호의’란 ‘신뢰’와 다르지 않다. 사람은 애초에 ‘합리’와는 거리가 먼 존재고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믿겠다’고 하는 추상적이고 가느다란 연결고리 하나만으로 이만큼의 공동체를 이룩한 게 아닐까.

불확실한 타인을 신뢰함으로써, 타인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 예의와 선을 지켜 모두의 불행을 초래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는 것. 이러한 믿음의 행위가 합리적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스스로 자신을 합리적인 존재라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나의 인간됨에 대한 타인의 신뢰에 기대어 자신이 최악의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비로소 인간은 조금 합리적이게 된다. 즉, 인간은 합리적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따름이다.

쌍방이 신뢰를 주고받는 사이일 때 서로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지닌 관계가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을 영향력 있는 존재라 감히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영향력’이 권력ㆍ권위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탓이다. 그러나 자신이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만큼은 분명하게 목격된다.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감각인가. 나의 말이나 행동에 의해 타인의 삶이 조금은 바뀔 수 있거나, 타인의 어떤 부분에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거나, 한 사람의 삶에 무시하지 못할 중요한 지점으로 남는 것인가? 문제는 그것이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도 없이 많은 ‘영향력’의 나쁜 사례를 보라. 위계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리, 미투(Me too), 착취의 사례들. 여성ㆍ청소년ㆍ제자ㆍ후배라서 벌어지는 사회면의 많은 뉴스와 일상을 둘러보면 위계란 그저 인간에 대한 신뢰는 저버리고 영향력과 인정욕이 기괴하게 결합된 것에 불과한 듯 보인다.

그러나 잊지 마시라. 이들에 대한 처벌과 용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부디 자신이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 존재하는 생물임을 인지하고 위계와 영향력의 환상에서 벗어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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