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44. 페르시아의 본영, 파사르가데

독수리가 앉아 있는 모습을 닮은 독수리산.

자동차가 세게 흔들린다. 더위에 지쳐 내려앉던 눈꺼풀이 번개처럼 제자리를 찾는다. 차는 어느덧 사막을 빠져나와 거친 산악지대를 오르고 있다. 이란의 등줄기인 자그로스 산맥을 횡단하고 있다. 고도계는 해발 2200미터를 가리킨다. 조금 평탄한 길로 접어들자 안내인이 차를 멈추고 앞쪽을 가리킨다. 흡사 기세등등한 독수리가 앉아있는 모습의 바위산이 보인다. 날카로운 부리, 예리한 눈빛, 윤기 흐르는 깃털의 형상까지 실로 흠잡을 데 없다. 직접 보면서도 눈을 의심할 지경이니 절로 나오는 탄성을 어찌 막으랴.

이란이 원산지인 석류.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석류의 원산지

한참을 달려가노라니 석류나무들이 보인다. 석류의 원산지인 쉬르쿠흐(사자산)를 지나고 있다. 석류는 서양에서는 생명과 지혜의 과일로 알려져 있다. 석류는 기원전 2000여 년부터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10세기 이집트의 18왕조 파라오의 피라미드 벽화에도 새겨져 있다. 이 과일은 건조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까닭에 실크로드를 타고 동서로 퍼져나갔다. 기원전 4세기에는 지중해에서 유럽 남부지역까지 전해졌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진출과 함께 인도에도 전해졌고 이어서 동남아 여러 나라로 전파됐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도 뿌리를 내렸다.

석류라는 이름은 중국 한 무제 때 장건이 서역 정벌에 나섰다가 귀국할 때 가져오면서 붙여졌다. 페르시아(安石國, 安息國)에서 가져온 과일이라 해서 안실류(安實榴) 또는 석류(石榴)라고 한 것에서 비롯했다. 동양에서 석류는 다산과 풍요의 의미를 지닌다. 붉은 꽃과 빨간 열매, 그리고 속에든 씨도 새빨갛다. 예로부터 붉은 색은 사귀(邪鬼)를 제압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석류는 재액을 막아주는 나무였다. 그래서 장독대 옆에는 반드시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자잘한 씨가 가득한 석류는 자손의 번창을 의미했다. 딸 혼수품에 석류를 수놓아 부귀다남(富貴多男)을 염원했다. 열매의 신맛 때문에 임산부들이 좋아했는데, 석류를 많이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도 알고 보면 그럴 듯하다.

우리나라에는 대략 8세기경 중국을 통해 유입됐고 바다 건너 일본까지 전파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통일신라시대 암막새에는 석류당초문(石榴唐草紋)이 새겨진 것이 있는데 석류가 번영과 풍요의 상징으로 생활 속에 뿌리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새를 타고 반갑게 인사하는 노인.

페르시아인의 본영

쉬라즈를 가는 길목에 위치한 파사르가데(Pasargadae)에 들렀다. 파사르가데는 ‘페르시아인의 본영’이란 뜻이다. 이곳은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가 페르시아 발상지인 파르스에 건립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첫 수도였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는 승전 장소와 가까운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키루스는 연승했다. 리디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제국, 이집트를 정복했다. 그의 업적은 성서에도 기록돼있다. 키루스가 ‘유대인을 유배지에서 탈출시킨 사람이자 바빌론의 해방자’라고 말이다. 제국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 팽창했다. 아들인 캄비세스와 다리우스 1세가 그 역할을 다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와 그리스 아나톨리아, 이집트 나일 계곡을 포함해 옥서스 강이라고 불린 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야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했다. 즉, 기원전 6세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부로 둔 최대의 제국이었다. 이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이후에도 페르시아 왕조들은 일천 수백 년 동안 제국을 이어갔다. 이 지역 원주민들은 기원후 7세기가 돼서야 비로소 이 지역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다.

무너진 왕궁 사이의 주랑(柱廊).
키루스 왕의 무덤.

키루스 왕의 무덤

파사르가데의 중심부에는 왕궁 앙상블이 있다. 원래는 정원에 있던 왕궁들이었다. 왕궁들 사이로 주랑(柱廊)이 이어져있다. 검은 돌이 기단이 되고 흰 돌이 기둥이 된 주랑은 당대의 번영을 알려주는 듯하며, 기둥 위에 표현한 기괴한 동물 모습의 검은 석상들은 당대의 위용을 보여주는 듯하다.

파사르가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은 키루스 왕의 무덤이다. 6층짜리 피라미드 모양의 석조 무덤은 작렬하는 태양빛에도 아랑곳없이 우뚝하다. 키루스 왕은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나는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 아시아의 왕 키루스다. 그러니 내 무덤을 탐하지 말라”며 자신의 권위가 사후(死後)까지도 미치게 했다.

그러한 이유에선가? 기원전 324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점령한 후, 키루스 왕의 무덤에 경의를 표하고 무너진 무덤을 복원하라고 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무덤 안에서 황금으로 된 부장품과 침상, 식기 등을 발굴했다. 외형은 복원했지만 황금을 찾아낸 것이니 결국 전리품을 챙긴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복원한 키루스 왕의 무덤은 7세기에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이슬람 군이 이곳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도 그의 무덤은 무사했다. 키루스 왕의 무덤이 아닌 솔로몬 어머니의 무덤으로 알려진 덕분이었다. 성서의 기록대로 ‘바빌론의 해방자’였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내린 것일까. 어쨌든 대왕의 바람이 이뤄진 셈이다.

파세르가데 유적을 둘러보는 이란인들.

세계문화유산 지정, 관리는 엉망

왕의 무덤은 그 후에도 잘 보존됐다. 10세기에는 그 주변에 작은 모스크가 들어섰고 400년간 모스크를 오가는 순례자들이 왕의 무덤을 지켰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도, 여행자들도 모두 키루스 왕의 무덤에 경배하고 최초의 통일 제국 페르시아를 기억했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風波)는 파사르가데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갔다. 서아시아 최초의 다문화적 제국임을 자랑하던 다양한 건축양식도 하나 둘 파괴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유네스코는 2004년에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역사와 장대한 면적을 지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관리는 엉망이다. 입장료를 받는 사람만 있을 뿐 주요 유적지에 관리인은 보이질 않는다. 영어안내판은 망가진 지 오래고 관광객들은 마치 자신의 놀이기구처럼 유적을 함부로 다룬다. 이미 황폐해져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문화유산에 대해 황폐한 사람들이기 때문인가.

※ 허우범은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곳곳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 역사적 사실을 추적,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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