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유도 독립운동가 조명원ㆍ조종서ㆍ문무현ㆍ이난의ㆍ최봉학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용유도 청년 혈성단, 3ㆍ28 독립운동 주도

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운동사’를 보면, 1919년 3월 28일 부천군 용유면(현재 인천 중구 용유동)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용유면 군중 150여 명이 관청리 광장에 모여 큰 태극기를 중앙에 달고 기세를 떨쳤다.

이 독립만세운동으로 일제의 재판을 받은 사람은 11명이고 모두 옥고를 치러야했다. 이중 일제가 일상적으로 감시한 인사를 정리해놓은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에 등장한 인물은 조명원ㆍ조종서ㆍ문무현ㆍ이난의ㆍ최봉학 지사다.

‘독립운동사’를 보면, 용유면(龍遊面) 남북리(南北里)에 사는 조명원(趙明元)ㆍ조종서(趙鍾瑞)ㆍ최봉학(崔鳳鶴)ㆍ문무현(文武鉉) 등은 1919년 3월 23일과 24일에 조명원 지사 집에 모여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독립운동단체 이름을 혈성단(血誠團)이라 정하고 3월 28일을 기해 거사할 것을 결의했다. 이어서 광목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혈성단 4명(조명원ㆍ조종서ㆍ문무현ㆍ최봉학)의 이름을 적은 뒤 ‘3월 28일 독립운동 거행식을 관청리에서 갖고자 하오니 모두 모이도록 하라’는 격문을 제작해 일일이 봉투에 넣어 용유면 마을에 배포했다.

혈성단 단원들은 남북리와 그 인근 거잠리(巨蠶里)ㆍ을왕리(乙旺里)ㆍ덕교리(德橋里) 등을 다니며 글을 아는 사람에게 격문을 배포했다. 그 뒤 3월 28일에 관청리 광장에서 군중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을왕리에서 이난의(李蘭儀) 지사를 비롯한 군중이 집결해 조명원 지사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관청리를 향해 행진했다.

‘일제 감시 인물 카드’에는 없지만 3월 28일 만세시위로 재판을 받은 이에는 윤치방(尹致芳)ㆍ김윤배(金潤培)ㆍ윤보신(尹寶臣)ㆍ유웅렬(柳雄烈)ㆍ오길서(吳吉書)ㆍ오기섭(吳基燮)이 더 있으며, 이들 모두 옥고를 치렀다.

혈성단 지도자 평균나이 21세
 

용유도 독립운동가 조명원ㆍ조종서ㆍ문무현ㆍ이난의ㆍ최봉학 지사의 사진과 조서.

조명원(趙明元) 지사의 경우 ‘일제 감시 인물 카드’에 조수동(趙壽童)이란 이름이 나란히 기재돼있다. 조 지사는 1901년 7월 2일생으로 당시 19세였다. 본적과 주소 모두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 868번지이며, 출생지는 경성부(京城府) 마포동(麻浦洞) 249번지로 나온다. 직업은 농민이며, 키는 167cm정도이고 신분은 양반으로 기록돼있다.

용유도 만세운동의 지도자로서 1919년 7월 19일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1919년 9월 27일 기결수로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가 1920년 6월 26일 만기 출소했다.

조종서(趙鍾瑞) 지사는 1899년 8월 13일생으로 죽산 조봉암과 같은 해 태어났다. 당시 21세로 본적과 출생지, 주소 모두 용유면 남북리 872번지였다. 직업은 없고 신분은 양반으로 기록돼있다. 키는 165cm가량으로 나온다.

조종서 지사는 조명원 지사와 함께 1919년 7월 19일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9월 27일 기결수로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문무현(文武鉉) 지사도 1899년 4월 17일생으로 당시 21세였다. 본적과 출생지, 주소 모두 용유면 남북리 636번지였다. 직업은 농업이고 키는 163cm 가량이며, 다른 이름은 문무연(文武年)이다.

‘일제 감시 인물 카드’에는 문무호(文武鎬)로 기록돼있으나, 판결문 등 관련 자료에는 문무현(文武鉉)이란 인물은 있어도 문무호는 없다. 또, 판결문을 보면 문무현의 주소가 남북리 636번지로 돼있기에 ‘감시 카드’상 문무호의 ‘(호)鎬’는 ‘(현)鉉’의 흘림체를 오독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 지사도 1919년 9월 27일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가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최봉학(崔奉學) 지사는 1897년 3월 26일생으로 당시 23세였다. 본적과 출생지, 주소 모두 용유면 남북리 180번지였다. 직업은 상인이었고 키는 163cm가량으로 나온다.

최 지사 또한 조명원 지사와 함께 1919년 7월 19일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19년 9월 27일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가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을왕리 만세운동의 지도자 이난의 지사

조명원 지사와 을왕리에서 호응하기로 약속한 이난의(李蘭儀) 지사는 1885년 9월 30일생으로 당시 35세였다. 본적과 출생지, 주소 모두 용유면 을왕리이며, 판결문에 따르면 지번은 을왕리 521번지이다. ‘일제 감시 인물 카드’ 기록을 보면, 키는 163cm정도이고 직업은 농민이며, 목 부분에 찔린 상처가 있다.

이 지사는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선고받고 1920년 1월 12일 기결수로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가 1920년 11월 11일 만기 출소했다.

특이하게 이 지사의 선고일과 형기 시작일 사이에 반년 이상 차이가 난다. 판결문을 보면, 이 지사는 선고일에 출석하지 않았다. 이를 토대로 추정하면 선고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체포돼 수감됐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첫 선고 후 이난의를 제외한 10명은 재심을 청구했고 일부는 1919년 7월 19일 감형됐다. 문무현ㆍ조명원ㆍ조종서ㆍ최봉학 지사 등은 상고까지 했는 데, 이난의 지사는 재심 청구 여부가 불투명하다. 아울러 징역 1년 8월은 을왕리 만세운동 참가자 중에서 비교적 중형에 해당하기에 이 지사의 행적을 추가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 5명 외에도 김윤배(金潤培, 32세, 농민, 용유면 남북리 482번지), 윤치방(尹致芳, 32세, 농민, 용유면 남북리 397번지), 윤보신(尹寶臣, 22세, 경성공립농업학교 1학년, 용유면 남북리 946번지), 유웅렬(柳雄烈, 23세, 농민, 천도교, 용유면 을왕리 457번지), 오기섭(吳基燮, 38세, 음식업, 용유면 덕교리 482번지), 구길서(具吉書, 24세, 농민, 용유면 덕교리 693번지) 등이 용유도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남북·거잠·을왕·덕교리 주민들 모여 만세시위

조선총독부 검사 최호선(崔浩善) 검사는 이들에게 보안법 위반을 적용했고 경성지법은 각각 징역 6월을 선고했다.

일제가 작성한 판결문은 ‘독립운동사’에 기록된 내용과 비슷하다. 일제는 “조명원은 조선독립운동의 거사에 찬동해 정치변혁의 목적으로 그가 거주하는 동리(마을)에서도 같은 운동의 기운을 빚어내려고 대정 8년(1919년) 3월 23~24일경 조종서를 만나고 이어서 최봉학ㆍ문무현을 불러 의논했다”고 했다.

조명원 지사 등은 만세운동을 결의한 뒤 조명원 지사의 집에서 결사한 단체의 이름을 혈성단(血誠團)이라 하고 28일을 기해 거사하는 것을 결의한 뒤, 광목에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고 그 위에 ‘혈성단 주모(자) 조명원ㆍ조종서ㆍ문무현ㆍ최명교(崔明敎, 최봉학의 별명)’라고 크게 썼다.

조명원 지사 등은 조명원 지사의 집에 모여 4명(조명원ㆍ조종서ㆍ문무현ㆍ최봉학)의 글씨로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고 쓴 격문 80여 통과 신서를 작성한 뒤 봉투에 넣어 4명이 구역을 분담해 남북ㆍ거잠리(巨蠶)ㆍ을왕ㆍ덕교리 주민 중 글을 읽을 줄 아는 주민에게 배포하고 독립운동시위에 참가할 것을 선동했다.

약속한 28일이 되자 조명원 지사를 비롯한 4명은 관청리 광장으로 가서 앞서 제작한 태극기를 세우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했고, 28일 거사에 호응하기로 한 용유도 군중 150여 명이 시위에 가세했다. 여기에 이난의 지사가 을왕리에서 조직해 참가한 군중이 합류해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난의 지사는 조명원 지사 등과 호응하기로 약속하고 이날(3월 28일) 을왕리 주민들을 소집한 뒤 태극기를 휘날리며 선두에 서서 이들을 인솔해 관청리 광장으로 행진해 집회에 참여한 군중들과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일제는 조명원 지사를 비롯한 애국지사들에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름으로써 모두 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며 보안법을 적용한 뒤 징역형을 선고했다.

[도움말ㆍ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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