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40주년 기획 - 인천대 국립화 과정 <2>

[인천투데이 김강현 기자] 1979년 인천공과대학, 1980년 인천대학, 1988년 인천대학교, 1994년 시립 인천대학교, 2013년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개교 이후 지금까지 ‘인천대’의 이름이다.

1979년 개교 후 인천대는 이른바 ‘비리사학’에서 시립대를 거쳐 인천 공교육의 핵심이자 우리나라 교육을 책임지는 국립대학으로 유래없는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인천대 개교 40주년을 맞아 인천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인천투데이>가 조명한다.

민주화 성공, 그 이후

1979년 개교한 인천대학교는 1994년 그토록 부르짖던 민주화에 성공하며 비리사학인 선인학원을 몰아내고 시립대로 전환했다.

대학 갈등의 원인이었던 재단이 물러나자 캠퍼스에는 갈등 대신 화합과 연대의 바람이 불었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며 자치활동을 했고 교수들은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으며 직원들 역시 학교 행정업무에 전념해 대학 정상화와 발전을 도모했다.

1993년 인천대학교 시립화 기념 대축제 사진. 이 행사를 통해 인천시와 인천대는 시립화를 대내외적으로 알렸다.

물론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립대 초기에는 선인재단의 입장에서 백인엽을 추종했던 이른바 ‘백파’교수와 직원들을 ‘인적 청산’하는 과정에서 인천대 교수 25명, 인천전문대 교수 27명이 임용에서 제외됐고 이들의 집단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인천대 시립화의 주인공인 학생들은 등록금이 7% 인상 등에 대해 항의하며 인천대 시립화 기념행사 참석을 거부하며 농성을 진행하기도 했다. 대학의 민주화는 이뤄냈지만 대학과 학생, 그리고 새로운 재단인 인천시와 갈등은 지속됐다.

하지만 대학 발전을 위한 기반도 동시에 마련되기 시작했다. 신임교수를 채용해 교육의 질을 높이는 한편 인천지역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인천 출신 학생의 입학금 면제도 시작해 인천 출신 학생의 비율을 50% 정도로 끌어올렸다.

언론·종교·시민사회 등 각계 인사로 구성된 대학운영위원회를 발족해 대학 발전계획과 교육기반시설 확충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도 시립화 직후부터다. 민주화를 이뤄낸 학교인 만큼 학생 등 각 주체들의 계속되는 의견 제시로 논쟁과 갈등을 통해 더 나은 방향을 찾으며 인천대의 발전은 시작됐다.

인천전문대 통합과 송도 이전

인천대와 인천전문대 통합은 시립화 1년 후인 1995년 8월 24일 처음으로 공식 발표됐다. 인천시는 2개의 시립대학을 운영하는 데 재정부담을 덜기 위해 양 대학의 통합을 주장했으나 구성원들의 의견을 전혀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발표라는 비판 아래 곧 무산됐다.

학생들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출발해 잘 나가는 대학 하나 키우기 위해 힘없는 대학은 희생하라는 방식”이라며 통합을 반대했으나 대학에 투입되는 재정을 줄이고 인천대의 몸집을 키우기 위한 방법인 통합 논의는 계속 이어졌다.

송도 이전에 대한 논의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 1995년 11월 최기선 인천시장은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송도에 40만 평 내외의 부지를 선정해 명문대의 위용을 갖춰야 한다”고 말하며 송도 이전 필요성을 제시했다.

이후로 대학당국과 교수협의회, 학생회는 도화동에 있는 현 캠퍼스를 유지하느냐, 송도로 입전하느냐를 두고 논쟁을 이어갔다. 당시 도화동은 인천의 번화가 중 하나였고, ‘송도’라는 도시가 바다 아래 있을 때 여서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 많았다.

송도 이전은 이후로도 계속 논의됐다. 시가 제안한 캠퍼스 이전 예정지 규모는 처음 40만 평에서 한 때 50만 평까지 갔다. 시는 바다 아래 있는 송도라는 도시에 우선 대학이라도 유치해 건설계획 안전성을 높이겠다는 이유로 인천대 이전을 적극 유도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 ‘IMF외환위기’가 터지며 송도 개발계획이 전면 중단됐고 당분간 송도캠퍼스 이전 논의는 멈췄다. 이후 2002년 최기선 인천시장이 송도신도시 4공구에 15만 6000평의 이전부지 체결을 약속했고 2008년 이전 전체 캠퍼스 이전 계획이 확정됐다. 2009년 여름 이전한 현재 인천대 송도캠퍼스는 13만 8699평이다.

인천대 송도 신 캠퍼스 조감도

 국립대학으로

인천대가 인천전문대와 통합이 논의되고 송도캠퍼스 이전 등이 논의되는 동안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시작됐다. 바로 인천대 국립화다.

인천대 국립화가 공식적으로 논의 된 것은 2003년부터다. 당시 인천시는 송도국제도시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경쟁력있는 대학을 유치하고 인천대에 지원하는 재정을 줄이기 위해 인천대 국립화를 정부에 건의했다.

당시 인천은 260만 명의 광역시임에도 국립대학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인천대의 국립대 전환은 시민들의 이해와도 일치했다. 게다가 시의 불안정한 재정지원 아래에서 예산 부족에 시달리면 학생과 교수, 직원들 역시 국립대 전환이라는 큰 방향에 동의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인천의 국회의원과 시·군·구의회의원 135명이 청와대에 인천에 국립대학을 건설해줄 것을 건의하는 문서를 전달했고 2004년 7월 8일 ‘인천지역혁신발전계획토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인천에는 260만 명이라는 막대한 인구가 있으나 국립대가 없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하며 국립대 전환의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로부터 약 한달 후 노 대통령은 교육인적자원부에 인천대 국립대 전환을 검토할 것을 명했다.

이어 인천대 국립화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100만 인 서명운동’이 시작된다.

2005년 봄, 인천대 국립화 범시민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며 100만 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100만 명의 숫자는 성공을 위한 목표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인천대 국립대 전환 인천시민 130만 서명운동 (사진제공ㆍ인천대민주화기념사업회)

그러나 인천시민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2005년 4월 8일에 시작한 서명운동은 일주일 만에 60만 명을 돌파하더니 이로부터 이틀 만에 80만 명을 돌파했다. 서명운동이 끝난 23일에는 130만 38명의 서명이 인천대 본관 현관을 가득 채웠다. 당시 영·유아와 노인 등을 모두 포함한 인천시의 인구가 260만 명 이었던 것을 볼 때 130만 명의 서명용지는 인천 전체의 의견이라고 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인천대와 시민추진위원회는 이 서명용지를 모두 복사해 트럭에 나눠 싣고 인천시내 한 바퀴를 행진한 후 한 부는 국회로, 한 부는 교육부로 전달했다.

이어 열린우리당 문희상대표와 한나라당 박근혜대표,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 등을 만나 서명용지를 전달하며 인천대 국립화를 요구했다.

인천시의 제안으로 시작해 인천 시민 모두의 바람인 인천대 국립화는 노무현대통령의 발언 이후 인천시민 130만 명 서명운동을 거치며 정점을 찍었다.

2005년 국립대 전환 촉구 걷기대회 (사진제공ㆍ인천대민주화기념사업회)

국립대학법인화?

그러나 순탄하게 흘러가던 인천대 국립화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국립대 법인화가 그것이다.

당시 국립대학 통폐합과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던 참여정부가 인천대 국립대 전환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수많은 인천시민들의 염원인 인천대 국립화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 차선책으로 국립대 법인화를 계획했다.

국립대 법인화는 한 마디로 ‘대학 민영화’다. ‘자율성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국립대에 지원하는 재정을 줄이고 대학이 스스로 돈을 벌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바로 국립대법인화의 핵심이다.

게다가 법인화가 되면 대학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정부 인사가 자리를 차지해 자율성 또한 정부의 입맛에 따라 달라질 우려가 있다. 총장 또한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선출하며 자율성 훼손이 심각하게 우려된다.

국립대 법인화가 논의되기 시작하자 당시 인천대 직원 노조는 대학 자율성 훼손을 우려하며 법인화를 반대했고 총학생회는 충분한 재정지원이 되지 않을 것은 우려하며 법인화에 대한 우려입장을 표했다. 일부 교수들 역시 재정의 취약과 자율성 훼손 등을 이유로 법인화를 반대했다.

학내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으로 나뉘기 시작했으나 정부는 발 빠르게 법인화를 추진하며 2006년 4월 3일 박호군 인천대 총장의 입회 하에 김진표 교육부총리겸 장관과 안상수 인천시장이 인천대 재정 지원 등을 담은 인천대 국립대학 특수법인 MOU를 맺으며 국립대법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국민적 반대에 가로막히며 주춤하던 국립대법인화 정책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되살아난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인천대 뿐만 아니라 모든 국립대의 법인화를 계획했다.

이런 여러 과정 속에 인천대는 2009년 8월 송도 캠퍼스로 이전했고 2010년 인천전문대와 통합하며 전체 학생이 약 1만 3000명 규모로 확대되는 등 인천을 대표하는 종합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인천대를 두고 정부와 시의 핑퐁게임

그러나 열악한 교육재정이 인천대 발전에 발목을 잡았다. 선인재단의 사립대학 당시 인천대가 소유하고 있던 땅과 재산은 시립화가 되며 모두 인천시로 이관됐는데, 시가 국립대를 추진하면서 기존 인천대의 재산은 내놓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시는 인천대의 재정지원을 줄이기 위해 국립대를 추진했고 정부는 국립대에 들어가는 재정을 줄이기 위해 국립대 법인화를 추진했다. 이 사이에서 인천대는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는 ‘오리알’신세가 됐다.

MOU 내용에 따라 정부는 인천대 법인화 이후 5년간 재정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시는 국립대가 되면 시의 책임이 없어지니 재정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계속 보였다.

재정지원 약속 이행 등 인천시의 책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당장 법인화가 된다면 기본적인 학교 운영이 불가능할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게다가 전문대 통합 이전 지어진 송도캠퍼스는 8000명이 생활할 수 있는 규모인데, 통합으로 학생 수만 1만 3000명으로 늘어나며 교육의 질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도 발생했다.

시가 약속한 인천대 송도 이전과 전문대 통합과정에 따른 재정 지원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수협의회와 직원노조 등 구성원들은 인천대 법인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법인화 반대 입장을 밝혔다.

법인화 반대투쟁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국립대 법인화를 강하게 밀고 나갔고 결국 2012년 서울대학교가 법인 국립대학으로 전환됐고 2011년 12월 30일 국회 임시회에서 인천대 법인화법이 순식간에 통과됐다.

당장 대학운영이 가능한 최소한의 재정적 기반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천대 법인화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학내 구성원들의 갈등도 계속됐다. 우선 이 기회에 국립대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과 안정적인 재정지원 등이 담보될 때 까지 유보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대학본부는 법인화라도 국립대를 추진할 수 밖에 없다며 이를 강행했다.

이에 2012년 총학생회는 법인화 유보에 대한 찬성·반대 학생총투표를 진행했고 전체 학생의 55%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 67%의 유보 의견이 나왔다.

총학생회가 진행한 학생총투표 결과

학생총투표 이후 교수협의회는 ‘빈털터리, 빚더미 법인화 유보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직원노조와 총동문회는 인천시의 인천대 재산 반환과 지원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성명을 연이어 발표하고 법인화를 추진하는 대학집행부를 규탄하며 총장실 폐쇄 등 학내 투쟁도 이어갔다.

대학구성원들은 인천대 법인정상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공동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특히 총학생회는 법인정상화를 위한 공동행동을 선포하고 재상지원 등을 요구하는 인천시청 앞 천막농성을 진행했다.

대학구성원들의 이런 투쟁에 지역사회역시 함께했다.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는 정상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여러 시민단체들이 모여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인천대 만들기 시민모임을 발족하고 대응에 나섰다.

이런 움직임 끝에 송영길 인천시장과 최성을 인천대 총장은 법인화가 되는 2013년 1월 18일을 하루 앞두고 송도 11공구 10만 평과 유수지 3.3만 평 등의 부지와 9432억 원에 달하는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날 법인국립대로 전환했다.

인천대 법인국립대 전환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어쨌든 인천대는 현재 법인국립대학으로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사학비리에 몸살을 앓던 이전과 비교했을 때 눈부신 성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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