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무성의로 성균관대에 작품 1000여 점 기증
10년전 생가터에 전시관 짓기로 했다가 흐지부지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인천시의 안목 없는 문화 행정이 빈축을 사고 있다. 당대 서예 거장이 미술품과 유품을 기증하겠다고 해도 이를 수용 할 전시관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서울로 넘어갔다. 인천이 낳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 검여 유희강 선생의 얘기다.

검여 유희강(1911~1976년) 선생은 1911년 인천시 시천동(현재 검암 시천동) 출신으로 추사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 서예가로 꼽힌다. 한국서예가협회 회장과 인천시립도서관 관장, 인천시립박물관 관장 등을 지냈다.

10여 년 전 유희강 선생의 유족은 인천시에 습작 600점과 작품 400점 등 1000점과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등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시가 거부했다. 시의 거부로 유족은 검여 선생의 작품을 성균관대에 조건 없이 기증했고, 이번에 첫 특별 전시회가 열린다.

성균관대는 검여 선생의 ‘관서악부(關西樂府)’ 등 100여 점을 공개하는 특별전 ‘검무(劍舞)’를 31일부터 진행한다고 밝혔다. 성대박물관은 관서악부를 상설 전시하는 ‘관서악부실’도 공개한다.

관서악부는 검여의 대표작으로 길이만 34m에 이르는 종이에 글씨가 빼곡이 적혀 있는 대작이다. 손으로 써 내려 간 글자 3024자가 때로는 엄숙하게, 때로는 춤을 추듯 흐른다.

검여 유희강 선생 생가 기념비

검여는 1937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38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동방문화학회(東方文化學會)에서 중국의 서화와 금석학을 공부했다. 또 상하이 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검여는 1939년 베이징 동학회어학교(同學會語學校)를 졸업했고, 1940년에는 ‘강서시보((江西時報)’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검여는 또 1945년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지대장(支隊長)의 비서로 있다가 해방과 함께 1946년 귀국했다.

검여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1954년에서 1961년까지 인천 시립박물관장, 1955년 대동서화 동연회(大東書畵硏究會) 회장과 미술가협회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1년 이후 국선 심사위원을 지냈다.

1962년과 1965년에는 인천교육대학과 홍익대학교의 강사로 재직했으며, 1959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인천과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검여는 ‘검여서숙(劍如書塾)’을 열어 후배들을 지도해 오던 중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실어증과 반신불수의 병고를 치렀다.

그러나 병고가 그의 예술혼은 꺽지 못했다. 추사를 흠모했던 검여 또한 추사를 따라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서도에 정진했다. 검여는 오른손이 마비된 상태에서 왼손으로 쓴 글씨로 1971년 제3회 개인전을 열어 반향을 일으켰다.

이처럼 검여는 인천이 낳은 당대의 거장이자 추사 이후 한국 서예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정작 인천은 그를 알아줄 안목이 없었다. 검여가 남긴 작품만 모아도 미술관을 만들고도 남을 일이지만 애석할 따름이다.

시는 2007년 서구 시천동 검암근린공원(검여 생가 터)에 검여 선생 자료관을 짓겠다고 했으나 흐지부지 돼버렸고, 그러는 사이 작품은 모조리 서울로 넘어가 가버렸다. 현재 생가터엔 기념 표지석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민운기 스페이스빔 대표는 “검여 선생 작품만 놓친 게 아니다. 검여와 쌍두마차로 평가받는 동정 박세림 선생의 작품도 인천에 없고 대전대학교에 가야 볼 수 있다. 국내 경제규모 2위, 300만 도시라고 하지만 인천의 수준과 안목을 보면 씁쓸하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