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배심원들 (Juror 8)
홍승완 감독│2019년 개봉

[인천투데이 이영주 시민기자] 2008년 대한민국 법정에서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첫 국민참여재판이 열린다. 최초의 국민참여재판을 맡은 김준겸 판사(문소리)는 18년 동안 형사부를 전담한, 강직하고 성실하기로 유명한 여성판사. 그리고 최초의 배심원으로 선정된 이들은 나이와 성별, 직업, 성격도 제각각인 보통 사람 8명이다.

공대를 졸업하고 뒤늦게 법대에 진학한 늙은 대학생 그림(백수장), 10년 넘게 병든 남편 수발을 해온 춘옥(김미경), 재판보다는 일당과 간식에 관심이 많은 단역배우 진식(윤경호), 깍쟁이처럼 보이는 중산층 가정주부 상미(서정연), 누구보다 재판을 잘 아는 것 같은 대기업 비서실장 영재(조한철),30년간 시체 닦는 일을 해온 기백(김홍파), 취업준비생 수정(조수향), 여기에 개인회생이 시급한 청년창업가 남우(박형식)가 결원을 메우느라 급하게 동원된다.

보통의 시민들은 어지간해서 접해보기 힘든 재판의 방청도 아닌 판결에 (법적으로는 결정적 영향을 주지 않고 참고만 한다고돼있지만) 참여하게 된 이들이 맡게 된 사건은 아들이 어머니를 아파트에서 떨어뜨려 살해한 혐의의 존속살해 사건. 이미 피고인이 자백했고 목격자와 증거도 있으며,부검의의 소견까지 유죄로 거의 확정된 사건이다. 재판부는 배심원들에게 이미 유죄는 확정적이니 검사 측 소견과 변호사 측 변론을 듣고 양형만 결정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피고인 강두식(서현우)이 법정에서 사건 당일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을바꾸고 남우를 비롯한 배심원들이 경찰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으로 재판의 양상이 급변한다.

홍승완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인 ‘배심원들’은 실제 2008년 대한민국 사법부의 첫 국민참여재판을 모티브로 사건과 인물을 창작한 법정 영화다. 그러나 검사와 변호사의 논리적인 공방이 긴장감과 통쾌함을 자아내는 여느 법정 드라마와는 전혀 다르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이 배심원 8명이라 할 수 있는데, 법과 재판을 전혀 알지 못하는 보통의 시민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진실을 파헤치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법정 드라마의 통쾌함보다는 ‘보통의 상식’으로 사건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집중하게 만든다.

배심원들은 나이와 성별,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판결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재판에 집중하는 순간, 지금껏 경찰과 검찰과 법원의 익숙해진, 그래서 오히려 진실로부터는 멀어질 수도 있었던 관례에 균열이 일어난다. 보통의 상식이 견고하게만 보이는 재판정의 관례를 뒤집는 과정은 피고인이라는 이름에 가려 있던 한 인간의 존엄을 발견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법을 잘 모르는 이들도 다 아는 용어지만, 대부분의 사건들은 겉으로 보이는 단면으로 쉽게 판단된다. 특히 존속살인처럼 끔찍한 사건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피고인의 사정이나 목소리는 볼 생각도 들을 생각도 없다. 아마 배심원 8명도 배심원이 아니라 방청객이었다면, 언론보도로만 이 사건을 접했다면 똑같은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판결하고 단죄하는 일의 엄중함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작은 의문 하나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었다.

배심원 8명에 합의부 판사 3명, 검사, 변호사, 증인, 피고인, 피고인의 가족까지 비중있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산만할 수도 있었고 하층계급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판결이라 신파로 빠질 수도 있었다.

오로지 재판정과 피고인이 살던 아파트, 단 두 곳이 배경이라 단조로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그 많은 배역들이 고르게 제역할을 하며 탄탄한 서사를 쌓으며, 평범한 인간들의 선의와 상식으로 관객을 설득한다.

특히 배심원들의 다소 감정적인 대응에 법과 원칙에 따라 대처하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놓치지 않는 김준겸 판사의 모습은 법이 인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당연하지만 현실에서는 사장된 진리를 묵직하게 전달한다.

※이영주는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이며, 평소 드로잉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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