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 (4)
[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 (4)
  • 김갑봉 기자
  • 승인 2019.05.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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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독립운동가 유봉진ㆍ염성오ㆍ유학용ㆍ이안득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2권에 수록된 강화군의 3ㆍ1운동은 부내면(府內面) 신문리(新門里), 즉 강화읍에서 1919년 3월 5~6일에 시작됐다.

유봉진(劉鳳鎭) 지사 등이 주도해 강화도 군중 1000여 명이 경찰서 앞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고, 그동안 검거한 사람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강화읍 3ㆍ1운동으로 징역형이나 태형 등을 받은 이는 33명에 달했다.

일제가 일상적으로 감시했거나 체포한 독립운동가를 정리해놓은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에 등장하는 ‘강화읍 만세운동 주동자인 유봉진ㆍ염성오ㆍ유학용’ 지사는 모두 징역형을 받았다. 같이 징역형을 받은 조인애 지사는 유봉진 지사의 아내다.

그리고 강화읍에서 떨어진, 현재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에서는 이안득 지사가 한 달 뒤인 4월 7일에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제에 의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다.

강화도 독립만세운동, 기독교 신자들 주축

강화읍에서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그동안 구속한 인사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자, 강화경찰서 경부 이해용(李海用)이 나서 요구를 들어줄 테니 해산하라고 했다. 군중은 그 말을 믿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면서 시위한 뒤 해산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그날 밤 몇 사람을 방면했다가 이내 다시 잡아갔다.[목격자 최영대(崔榮大, 72) 증언]

강화도 독립운동을 계획한 주요 인사는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지도자 유봉진 지사 외에도 신자들이 제법 등장한다. 유봉진 지사가 만세운동을 모의한 곳도 교회 목사 이진형의 집이었다.

또, 일제가 투옥한 인사에는 야소교(=기독교 감리교) 교사이자 <매일신보> 기자였던 조구원(趙龜元) 선생이 있다. 조 지사는 서울에서 일어난 3ㆍ1운동의 취지에 동의하고 이를 확대하기 위해 3월 20일 강화경찰서 경부 이해용에게 ‘대한독립운동을 찬동했거나 동 운동자를 검거해서는 안 된다. 만일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참살(斬殺) 또는 집에 방화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고제몽(高濟夢)은 강화읍 상인 유진극(兪鎭極)에게 독립운동에 찬동하고 이를 확대하기 위해 철시해야 한다며 ‘즉각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보냈다.

오영섭(吳永燮)은 강화경찰서 일본인 순사 부장 기희(紀憙美安)에게 ‘대한 독립운동자를 검거하려면 각오한 바 있어야한다’는 경고문을 보냈다. 이들 모두 필적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한 뒤 투옥됐다.

이밖에 구연준(具然濬)ㆍ김한영(金翰永)ㆍ김영희(金永禧)ㆍ조봉암(曺奉岩)ㆍ주창일(朱昌日) 등 5명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자유민보(自由民報)> 외 10여 종의 독립운동 문서를 작성해 강화읍에 반포했다.

강화 군중은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서 마당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경찰서 경부가 나와 여러 말로 해산시켰으나, 그 뒤 온수리(溫水里)에서는 유봉진 지사 등이 주도해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또 강화도 외포리 건너편 삼산면(三山面) 석모리(席毛里)에서는 연해주에서 돌아온 이안득(李安得) 지사가 4월 7일 밤 마을사람 10여 명과 함께 마을 당산(堂山) 꼭대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부르고 민족정기의 기세를 올렸다.

“아, 철산리 300호에 독립만세 한 장 없어 쓰겠느냐”

강화도 만세운동은 이듬해도 지속됐다. 양사면 철산리(鐵山里)에서는 1920년 1월 30일경 오용진(吳用辰)ㆍ임두업(林斗業) 등이 나서 만세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태극기 옆에 ‘대한독립만세! 슬프다 슬프다(大韓獨立萬歲 悲哉悲哉)’라고 쓰고, 다른 한 장에는 ‘독립 만세를 광고하는 것은 독립에 대한 발언이다. 이 글을 본 자는 노소를 불문하고 음력 7월 20일에 만세를 부르라. 이 말에 응하지 않는 사람은 금수(禽獸)와 같은 자이다’라고 쓴 격문을 철산리 중앙광장에 붙였다.

또, 황준실(黃俊實)은 오용진과 태극기를 만들고 그 옆에 ‘독립만세(獨立萬歲)’를 써넣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만세운동을 호소하는 글을 썼다.

“우리 동포는 이것을 보면 누구나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이 마음이 없는 자는 금수와 같다. 어찌 애국심이 없겠느냐? 공자는 ‘하늘에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 했다. 어찌하여 우리는 두 임금을 받들어야 하느냐? 아아! 철산리 300호 가운데 이러한 광고 한 장이 없어 쓰겠느냐. 음력 8월 7일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금수와 같은 무리들이다.”

그는 이 격문을 철산리 중앙광장 게시판에 붙였다.

만세운동의 지도자유봉진과 조인애 지사는 부부

강화읍 3ㆍ1운동에 참여한 이들 중 투옥된 이들은 모두 33명이다. 일제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등을 적용해 유봉진ㆍ염성오ㆍ조인애 지사 등 12명에게 징역형과 벌금을, 나머지 11명에게 벌금과 더불어 태형과 노역장 등을 선고했다.

조선총독부(검사 사전항태랑 寺田恒太郞)가 작성한 유봉진 지사의 공소 판결문에 유봉진 지사는 야소교(=기독교) 북감리파 사장으로, 한일합병에 분개해 조선을 독립시키려한 지사이자 강화도 만세운동의 지도자로 나온다. 유봉진 지사와 같이 징역을 받은 조인애 지사는 유봉진의 아내이다.

“유봉진은 대정 8년(1919년) 3월 초순 손병희 등이 경성(서울)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운동 시위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그 취지에 찬동해 강화도에서도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3월 6일경 야소교 목사 이진형(李鎭亨), 황유부(黃有富), 황도문(黃道文) 등과 협의하고 조상문, 유희철 등에게 통지했다. 그 뒤 황유부, 황도문 등과 함께 만세운동 권유 임무를 맡았고, 18일 강화군 읍내 장날을 기해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유봉진은 16일 주문도로 가서 운동 참가를 권유했고, 18일 기르던 말을 타고 강화도 내를 달려 종각에 올라 종을 치고 ‘결사대 유봉진’이라고 적은 깃발을 휘둘렀다.”

일제 감시 카드에 기록된 유봉진 지사의 인적 사항은 ‘1887년 3월 31일생으로 본적지는 길상면 온수리 501번지이며, 주소는 부내면 관청리’로 나온다. 키는 156cm가량이며, 체포 당시 직업은 금은세공업이다.

1945년 <자유신문>에 따르면, 12월 20일 김구 주석 참석 하에 강화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에서 유봉진 지사가 환영사를 했다. 유봉진 지사는 해방 후에도 강화에서 사회적 지위를 인정 받는 위치에 있었다.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은 유봉진 지사의 아내인 조인애(曹仁愛, 37) 지사에 대해 “조인애는 1만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라는 문서를 배포하고 강화군청과 경찰서 등에 몰려가 순사를 구타하는 소요를 일으켜 치안을 방해했다”고 기록했다.

조인애 지사는 징역 6월을 받았다. 조인애 지사의 주소는 길상면 온수리 501번지였다. 일제는 조 지사에게 소요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을 적용했다.

유봉진 지사와 조서
유봉진 지사와 조서
염성오 지사와 조서
염성오 지사와 조서
유학용 지사와 조서
유학용 지사와 조서
이안득 지사와 조서
이안득 지사와 조서

 

일제 기록, 강화 만세운동 참여 1만여 명

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운동사’에는 강화읍 만세운동 참여자가 1000여 명으로 나오지만,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유봉진 지사 등의 1심 판결문에는 시위 참가자가 1만여 명으로 나온다.

김용순, 이봉석, 주성일, 김영돈 등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1919년 3월 18일 오후 2시 강화읍 시장에 모인 1만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으며, 이 시위의 주동자는 유봉진 지사로 나온다.

유봉진 지사와 조인애 지사는 강화 만세운동을 위해 3월 8일 마을 교회 목사 이진형의 집에서 황유부, 황도문과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뜻을 같이한 사람들에게 다음날 9일 교회당에 모일 것을 통지했다. 9일 교회당에 염성오, 유희철, 장흥환 외 10여 명이 모였다. 참석자 중 조종환이 서울 독립운동 상황을 설명하며 강화도가 침묵할 게 아니라고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12~13일경 염성오 지사와 조인애 지사는 황도문으로부터 ‘조선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제하에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할 것, 일한병합에 대해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해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쓰인 인쇄물을 마을에 배포하고 선동했으며, 유봉진 지사는 11일 황유부, 황도문을 만나 18일 강화읍 장날 거사를 결의하고 강화군 인민들에게 인쇄물을 배포했다.

그 뒤 염성오 지사는 15일 자신의 집에 황일남 등 여러 명을 불러 18일 시위에 참가할 것을 약속했으며, 유봉진 지사는 16일 단신으로 주문도로 넘어가 교회당에 모여 있는 신자들에게 독립운동을 선동했다.

18일 장날에는 이들과 약속한 강화도 인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유봉진 지사는 만세운동에 늦을까 집에서 백마를 타고 나와 만세시위 군중을 누비며 독려했고 시장 부근 종루에 올라 타종하며 시위를 북돋았다. 장날 만세운동이 시작되고 강화경찰서 순사보 김덕찬, 염리선, 유재면, 김순덕 등이 진압하러 달려오자 시위 군중은 이들에게 함께 만세를 부르라고 했으며, 이들이 거부하자 발로 차고 넘어뜨려 구타했다. 유봉진 지사는 군중을 이끌고 군청에 도착해 군수 이봉종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했고 응하지 않으면 청사를 파괴하겠다고 겁을 줬다.

그 뒤 유봉진 지사는 군중에게 시위 중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자고 제안하고 오후 5시 강화경찰서 앞으로 몰려가 3시간 동안 석방 요구 시위를 전개했다. 석방 요구 시위에는 염성오 지사도 함께했다.

이 일로 일제는 주동자들에게 보안법 위반 등을 적용했다. 항소심에서 유봉진 지사 징역 1년 6월, 염성오지사 징역 8월, 유학용 지사 징역 3월을 각각 받았다.

염성오 지사는 유봉진 지사와 함께 만세운동 지도자다. 일제 감시 카드를 보면, 염 지사는 1878년 6월 4일생으로 본적과 주소는 모두 길상면 선두리 269번지이다. 체포 당시 직업은 농민이며, 부친은 염순홍(廉淳弘)이다.

유학용 지사는 1896년 2월 28일생으로 본적과 주소가 모두 길상면 선두리 875번지다. 키는 160cm가량이고 체포 당시 직업은 농민이었으며, 부친은 ‘劉景辰(유경진 또는 유경신)’이다.

연해주에서 석모도로 돌아온 이안득 지사

강화도 만세운동 지도자 중 눈길을 끄는 이가 있으니, 석모도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안득 지사다. 이안득 지사는 일제가 체포할 당시 19세로, 출생지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로 돼있다.

일제 감시 카드를 보면, 이 지사는 1900년 12월 25일생으로 본적과 주소는 삼상면 석모리로 나오지만 출생지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로 돼있다. 키는 167cm 가량이며, 직업은 농민이다.

일제는 이 지사가 4월 7일 밤 석모리 주민 10여 명과 함께 당산(堂山) 꼭대기에 올라 불을 지피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 치안을 방해했다며 보안법을 적용해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했고, 경성복심법원은 같은 해 8월 공소를 기각했다. 이 지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20년 4월 28일 출소했다.

판결문에는 “이안득은 예전 시베리아에서 배일사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거주 제한 처분을 받았다. 대정 7년(1918년) 9월 2일 이후 현주소(=길상면 선두리)로 이주한 자로 일한합병 당시부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찬동해 정치변혁의 목적을 가지고 4월 7일 오후 8시경 마을 당산에 올라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러 치안을 방해했다”고 돼있다.

이 지사는 본적이 석모도인데, 출생지는 연해주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18세에 석모도로 돌아왔다. 본적이 석모도라는 것은 이 지사 일가가 석모도에 있었다는 얘긴데, 이 지사의 일가가 어떤 이유로 연해주로 갔는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도움말ㆍ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