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 지음 | 이은진 옮김 | 이마 출판 | 2017.6.30.

[인천투데이 이권우 도서평론가]

“중앙집권적 국가에 대한 불신, 실질적 자유, 서로 이어지는 소규모 공동체, 지역과 그 언어에 대한 애착을 다시 듣게 된 것이다. 더불어 나와 비슷한 한 가지 태도를 포착했는데 그것은 정치를 거부하고 억눌린 집단적 심층의 세계로 복귀하려는 태도였다. 내가 ‘역사’를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태도였다.”

공부하려면 꼭 이렇게 해야 하는 법이다. 이른바 명문대를 나왔지만 교수 자격시험에 거푸 떨어졌다. 역사 교사로 활동하다 연구소에 들어갔다. 하는 일이 독특했는데, 열대 과일을 다루는 특수 연구소의 기록정보 부서에서 일했다. 그를 일러 한동안 바나나 수입업자가 역사책을 쓴다는 소문이 난 이유다.

한동안 아프리카와 교류가 끊어지면서 할 일이 줄어들어 거의 사서 업무만 보았다. 이 기간을 “나만의 독서와 고찰, 연구를 자유롭게 계속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한 직장에서 38년을 일했다. 일과 연구, 집필을 병행하면서 학술적 목적을 위한 여행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기회가 왔으니, 해외 전문 컨설턴트로 승진해 유럽을 유목민처럼 돌아다니게 됐다. 마침 죽음의 심성사를 다룰 계획이었다. 묘지나 교회, 그 리고 박물관을 두루 살펴보기로 했다. 단, 일이 끝나고.

“내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아내는 현장에서 연구 대상이 될 묘지 등을 청소했고 우리는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만 조사에 몰두했다. 또 주말, 개방 시간과 낮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얼마나 많은 묘지와 묘비명들을 흔들리는 촛불이나 라이터의 불빛으로 해독했는지 모른다.”

‘아동의 탄생’과 ‘죽음 앞의 인간’으로 유명한 필리프 아리에스의 자서전 ‘일요일의 역사가’에 나온 대목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크게 반성했다.

흔한 말로 주경야독하며 아리에스는 이른바 심성사 분야의 대가로 성장했다. 학문세계의 중심에 서본 적이 없다. 늘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를 일러 ‘일요일의 역사가’라 한 이유다. 심지어 사관을 같이 하는 아날학파 학자도 한동안 그를 무시했다.

그래도 그는 공부하고 글을 썼다. 전쟁 중에 겪은 일을 회고한 대목을 보며 다시 한 번 나를 되돌아보았으니, 이렇다.

“이틀에 한 번꼴로 밤마다 공습 사이렌이 울렸고, 그때마다 나는 전 재산이었던 집필 중인 원고와 조사 자료들을 들고 지하실로 대피해야만 했다. (중략)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나는 계속해서 수많은 교적부와 인구통계, 부부 침실의 내밀한 이야기, 사생활의 편린들을 분석하면서 우리 문화의 마르지 않는 원천들 즉,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 자신의 몸과 타인의 몸에 대해 맺는 관계들을 연구했다.”

역사학계의 ‘유격대원’이라던 그도 마침내 사회과학 고등연구원의 교수가 된다. 그의 나이 64세 때다.

새삼 놀란 것은 아리에스가 지독한 보수주의자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는 왕정주의와 반유대주의, 민족주의를 내세운 ‘악시옹 프랑세즈’를 설립한 모르스의 추종자였다. 얼마나 열심히 그 정신을 따랐는지 어릴 적부터 이 정신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패배한 다음 구성된 비시정권의 지지자였다. 이 정도일줄은 몰랐지만, 전통적 가치와 가톨릭 정신을 숭배하던 그였는지라 가능한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알제리 문제도 상식 밖의 입장을 보였다. 알제리의 프랑스화가 상당히 진행돼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판단했단다. 물론 자신이 짐작했던 것보다 “아랍적이고 카빌리아적인 바탕은 훨씬 더 강력하고 끈끈했다”며 오류를 인정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보수적인 역사가와 진보적인 상황이 만나는 역설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68혁명이 바로 그것.

68혁명을 주도한 청년세력이 쏟아낸 연설과 낙서를 보니, 자신이 반동적인 청년이었을 때 보았던 친숙한 주제들이 다시 나왔다고 한다.

“중앙집권적 국가에 대한 불신, 실질적 자유, 서로 이어지는 소규모 공동체, 지역과 그 언어에 대한 애착을 다시 듣게 된 것이다. 더불어 나와 비슷한 한 가지 태도를 포착했는데 그것은 정치를 거부하고 억눌린 집단적 심층의 세계로 복귀하려는 태도였다. 내가 ‘역사’를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태도였다.”

아리에스가 역사학자가 된 데에는 보수성이 강하면서도 목가적일 정도로 끈끈했던 혈연적 유대에서 비롯한 바가 있다. “앙시앵레짐과 혁명, 망명 귀족들, 반혁명을 환기하는 물건들과 기념품들”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역사에 대한 취향이 싹 텄다. 그런 그가 68혁명의 청년세대가 내세우는 새로운 세계관과 유사한 점이 있다며 놀라니, 아리에스는 이들을 보수주의적 공산주의 좌파라 이름 붙였다, 오히려 읽는 내가 놀랍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인지, 아니면 숨겨진 68혁명의 한계인지는 더 곱씹어볼 일이다.

아리에스는 세계 역사학계의 한 봉우리를 차지했다. 세상의 평가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열어가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들에게 아리에스는 격려와 희망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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