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40주년 기획 - 인천대 시립화 과정 <1>

[인천투데이 김강현 기자] 1979년 인천공과대학, 1980년 인천대학, 1988년 인천대학교, 1994년 시립 인천대학교, 2013년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개교 이후 지금까지 ‘인천대’의 이름이다.

1979년 개교 후 인천대는 이른바 ‘비리사학’에서 시립대를 거쳐 인천 공교육의 핵심이자 우리나라 교육을 책임지는 국립대학으로 유래없는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인천대 개교 40주년을 맞아 인천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인천투데이>가 조명한다.

1. 인천대 학원민주화, 비리사학 몰아내고 시립대로 전환하다

학원민주화를 바라는 인천대학교 학생들이 학내 집회 후 선인학원을 행진하고 있다.(사진출처ㆍ인천대 총동문회)

 선인학원의 탄생

예비역 중장으로 예편한 백인엽은 1958년 성광학원을 인수한 뒤 1965년 형의 이름 백선엽의 선, 자신의 이름에서 인을 따 학원 명칭을 ‘선인’으로 변경했다.

백선엽은 육군참모총장 등을 지낸 예비역 대장으로, 일제 시절 항일 세력을 무력 탄압하는데 앞장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돼 사형 위기에 놓인 박정희를 구해내는 등 군부 실세로서 박정희 정권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정권의 비호 아래 당시 인천의 노른자 땅인 제물포역 인근에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14개의 학교를 만들어 인천 최대의 사학재단을 만들었다.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고 인구수가 100만 명을 넘어선 1981년, 선인학원은 학생 3만 6400여명, 교직원 1만 4000여명이 소속 돼 있었다. 인천시 중·고교생 4명 중 한명을 선인학원에 재학 중이었으니 그 위세가 실로 대단했다.

군사독재시절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급격하게 성장한 선인학원은 온갖 부정과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학생들의 투쟁과 비리 적발로 물러난 백인엽, 그리고 백선엽의 등장

전두환 정권 초기, 정부는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개혁을 표방하며 비리사학에 대한 감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했고, 선인학원의 비리도 하나씩 밝혀졌다. 1979년 1월부터 무려 9900명을 부정 편입학했고, 기부금 61억 원 중 상당액을 백 씨가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환경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선인학원의 건물 내부에는 내벽공사를 하지 않아 황량하기 그지없었고 10층이 넘는 건물에 실내 화장실이 없어서 쉬는 시간마다 건물 밖에 설치된 재래식 화장실 앞에 학생들의 긴 줄이 생기곤 했다.

결국 개교 1년만인 1980년 3월, 인천대 학생 500여명이 학원자율화와 학생자치권강화를 요구하며 첫 시위를 전개했다. 이 중 150여명은 강의실에 남아 철야농성을 이어갔다.

1980년대 인천대는 학내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내 민주화 투쟁을 시작했다.(사진제공ㆍ디지털인천미추홀구문화대전)

학생들의 저항과 함께 백 씨의 추가로 비리가 드러나자 백 씨는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히며 선인학원에서 물러났고 이사회는 전원 사퇴했다. 이에 문교부는 1981년 4월, 처음으로 선인학원에 관선이사, 즉 문교부 추천 이사를 파견해 재단 정상화에 나섰다.

그러나 그해 7월, 신군부 핵심 인사들이 백 씨의 형인 백선엽을 선인학원 관선이사로 보내며 선인학원 정상화는 물거품이 됐다. 백선엽은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백인엽은 다시 이사장으로 복귀했다.

복귀한 백인엽은 교수 근무 평정인 ‘고과제’를 도입해 지시사항 준수 여부, 학교 방침 협조 자세 등을 평가해 교수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심복겪인 이른바 ‘백파’교수와 직원을 만들어 내며 재단을 통제했다.

그렇게 재단을 장악하던 백인엽은 교수와 직원들을 통해 학생까지 동원해 호교회(학교를 지키는 모임)를 조직하고 학생운동을 탄압했다. 호교회는 학내 대자보를 떼고 사물놀이 동아리실을 습격해 악기들을 부수는 등 무력으로 학생운동을 진압했다.

학생들의 저항

이에 맞선 학생들의 투쟁도 날로 격렬해졌다. 1986년 2학기, 인천대 학생들은 재단정상화투쟁위원회(재투위)를 구성하고 학내에서 백인엽 퇴진 등을 요구했다. 당시 재학생 정원이 5000여 명 이었는데, 매번 집회를 하면 그 중 1000명~2000명이 참석할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그러던 중 10월 21일, 비가 내려 학내 체육관에서 집회를 하기 위해 이동하던 학생들을 축구부 소속 호교회 학생 30여명이 각목과 하키채, 쇠파이프 등으로 무차별하게 구타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학기 중에, 그것도 대낮에 체육관에서 학생들이 못이 박힌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나와서 체육관에 들어가려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겁이 나서 아무 소리도 못하는 학생도 있었고, 항의하고 대응하는 예비역들도 있었지만 갑자기 나와서 무자비하게 패니까 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당시 폭력으로 뇌수술을 받은 학생도 있다” 당시 신입생으로 집회에 참가했던 정수영 인천대 이사의 증언이다.

이날 갑자기 일어난 폭력사태는 많은 학생들에게 목격됐고, 그동안 학교와 호교회의 학생 탄압으로 쌓인 분노가 표출됐다. 바로 다음날 열린 학생 비상총회에는 3500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전체 정원의 70% 이상이 집회에 참가한 것이다. 정수영 이사에 따르면 취업 등으로 학교에 없었던 4학년을 제외하면 학내 거의 모든 학생들이 집회에 참가했다.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단과대학 모든 학장실과 보직교수실을 점거했고 ‘더 이상 인천대에 다닐 가치가 없다’며 자퇴서를 쓰며 철야농성을 이어갔다.

학생들의 학장실 점거 모습. 이 과정에서 학교가 호교회를 운영했다는 증거가 발각되기도 했다. (사진제공·디지털인천미추홀구문화대전)

학생들의 항의가 거세자 백인엽은 이날 밤 인화여중 교장실로 서정홍 인천대 학장 등을 불러 이사장 퇴진 의사를 전달하며 사태 수습을 위해 교수들이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교수들은 10월 29일에 교수회의를 열어 수습대책위를 구성하고 백인엽 완전 퇴진 등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백인엽의 요구 때문이긴 하지만 선인학원 정상화 과정에서 교수들의 첫 개입이었다.

이런 가운데 학생들은 농성을 이어갔고, 문교부는 10월 31일 단일대학에는 전국 최초로 인천대에 휴교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농성을 이어가자 전두환 정부는 11월 1일, 건대항쟁을 진압한 전투경찰 2000여명과 헬기, 소방차 등을 그대로 인천대에 투입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학생대표들은 서둘러 다른 학생들을 귀가조치했다. 그리고 13명만이 최후까지 남아 농성장을 지켰다. 경찰은 이 중 5명을 구속하고 8명을 즉결심판에 넘겼다.

이 일련의 사건 이후 학생들의 투쟁 의지는 더욱 강하게 불타올랐다. 정수영 이사는 “이전까지 핍박받았던 학생들이 모이면서 강한 힘을 냈고, 억압이나 탄압이 없어지며 학교가 해방공간이 됐다. 이 때를 계기로 학내 민주주의가 활발하게 확대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백인엽은 다시 선인학원에서 물러났다.

인천대 학생들이 학내 집회 후 ‘백인엽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내를 돌고 있다.(사진출처ㆍ디지털인천미추홀구문화대전)

민주화 바람과 학교 구성원, 시민사회의 결집

그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타락한 정권을 바꾸기 위한 직선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4.13 호헌조치와 그에 저항하던 연세대 1학년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고 쓰러졌다. 이를 본 국민들은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와 87년 6월 항쟁을 만들었다.

이 같은 국민적 민주화 바람은 인천대에도 불었다. 인천대에는 다시 문교부의 관선이사가 파견되며 재단 정상화 작업이 시작됐고 젊은 교수들이 충원되며 교수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어 인천대는 1988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했고 1989년에는 선인학원 교사협의회도 구성됐다.

이들은 1991년 ‘범 선인학원 정상화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재단과 직접적인 대결을 시작했다. 학생들이 이끌어 온 투쟁에 드디어 교수 등 학내 구성원들이 함께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교조 인천지부와 목요회(인천의 교수 등 전문직들이 모여 창립한 단체)를 중심으로 토론회 가 열렸고, 이를 통해 선인학원의 문제를 시민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1992년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모임’이 발족하며 학생, 교수, 교직원, 시민들이 함께 선인학원 정상화를 위한 투쟁을 결의했다.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모임의 주관으로 1992년 2월 13일 인천 남구 도화동 성당에서 열린 ‘선인학원 정사화 방안 모색을 위한 인천시민공청회’(사진·인천대학교 총동문회)

 시민모임은 선인학원 정상화를 위한 시민 서명운동을 진행하며 한 달 만에 7만 명의 참여를 이끌어 냈고 <MBC> 송일준 PD를 팀장으로 한 PD수첩 팀이 선인학원 사태를 심층취재·보도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정치권의 결단과 시립화 성공

이런 여론과 함께 1993년 출범해 출범 초기였던 문민정부의 과감한 정책결정, 지방자치 시대 흐름에 올라타 1995년 인천시장 출마를 준비 중이던 최기선 인천시장의 결단 등을 통해 인천대는 1994년 시립화에 성공했다.

1993년 인천대학교 시립화 기념 대축제

 선인학원 정도 규모의 거대 사학이 시·공립화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인천대의 시립화는 우리나라의 법률체계와 행정 등 모든 것들을 바꾸는 혁신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과 그의 신임을 받은 최기선 시장은 관련 지침을 거침없이 개정해 나갔다. 불의에 맞선 학생들의 투쟁으로 시작된 인천대, 선인학원 학원민주화의 결실은 여전히 국내 유일한 사례이자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구성원들의 민주화 요구와 이를 통해 성장한 인천대의 구성원들은 지금도 여전히 학교를 ‘자신들의 것’으로 인식하고 다른 어느 학교보다 대학 운영에 직접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며 민주적인 대학 운영 구조를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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