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신현수의 중국여행 - 상해·항주·주장·소주 <2>

입장료를 내고 매원으로 갔다. 바로 여기가 윤봉길 의사 폭탄 투척장소다. 매원 안에 매헌이라고 이름 붙여놓은 작은 정자 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 1층과 2층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꾸며놓았다. 기념관 입구에는 윤 의사의 흉상이 있었고, 폭탄 투척 당시의 기록들과 관련 자료들, 조선 독립을 위한 청년시절의 농촌계몽 활동·조직 활동 등 관련 유물들을 모아놓았다. 도시락도 있었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초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 반윤단이라는 사람이 부모를 위해 지은 인공정원, 예원의 일부 모습.
노신공원을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로 갔다.
이곳은 1919년 4월 이후 서방과 러시아에 망명해있던 대한민국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던 중요한 자리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이후 일본의 감시를 피해 항주로 옮기기 전까지(1926~1932년) 청사로 사용되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임시정부 기념관에는 그 당시의 자료들이 전시돼있어 김구·안창호 선생 등의 활동과 임시정부 수립 전후의 독립운동을 되새겨볼 수 있다. 1층에서 간단한 비디오를 보고 난 후, 2층과 3층 전시관을 관람했다. 2층에는 당시 부엌·거실·회의실의 모습이, 3층에는 김구 선생의 서재 모습이 재연돼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우표·액세서리·장식품을 파는 작은 기념품점이 있다. 촬영금지였는데 사진을 왜 못 찍게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얘기는 들었지만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초라했다. 바로 옆은 그냥 중국인들의 살림집이었다. 그나마 재개발 과정에서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하니 이 정도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까?

하기야 우리나라에서도 챙기지 않는 임시정부의 역사를 중국인들이 미쳤다고 챙겨주겠는가? 챙기는 것은 고사하고 임시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정하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니 참으로 안타깝다. 다음은 <한겨레>에 난 관련 기사를 요약한 글이다.

“이역만리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가시밭길을 걸었으나 조국에 돌아와 동포의 흉탄에 쓰러졌던 백범의 수난은 계속되고 있다. 해방 뒤 임시정부의 회의실, 백범의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된 경교장(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1번지·사적 465호)의 복원 사업은 아무런 진전이 없다. 백범과 임시정부 인사들의 묘소가 있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성역화 사업은 무산됐다.

지난 2005년 국가보훈처·문광부·서울시 등 16개 기관·단체가 ‘정부지원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효창운동장과 효창공원을 합친 17만여㎡를 2008년까지 ‘효창독립공원’으로 새로 조성할 계획이었다. 예산도 260억여원이나 잡혔다. 그러나 효창운동장을 사용하는 축구계 등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 사업은 계속 표류하다가 현재는 사실상 물거품이 됐고, 예산도 ‘불용’처리됐다.

10만원권 새 지폐에 백범의 초상을 넣으려던 계획도 취소됐다. 2007년 11월 한국은행은 여러 절차를 거쳐 2009년 발행되는 10만원권의 인물로 백범을 선정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31일 한국은행은 물가 상승과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5만원권만 발행하고 10만원권 지폐 발행을 무기한 유보한다고 밝혔다.

한국은행의 해명과 달리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보수권력층의 백범에 대한 거부감이 주요 이유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백범이 주석을 지낸 임시정부의 정통성도 부정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한 뉴라이트 단체에게 만들게 한 뒤 전국의 중·고등학교·대학·군부대에 배포한 책자에서 ‘임시정부는 국제적 승인에 바탕을 둔 독립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기록했다”


명·청시대 대표적 건물양식, 예원

▲ 와이탄에서 바라본 황포강 건너 푸둥의 야경.
노신공원과 임시정부청사를 봤으니 이제 내가 상해에 온 목적은 거의 달성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공산당 제1회 전당대회지 표지판이 보였다. 이곳은 1921년 7월 23일 공산당 제1회의 당시 러시아 스파이를 발견하고 황포강 배위로 급히 장소를 옮겨 회의를 진행했던 기록과 사진이 전시돼있고, 중국의 근대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중국 근대사 배움의 장소’이다. 중국공산당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심플리 타이라는 태국음식점에 가서 늦은 점심과 함께 맥주 한 잔을 먹었다. 톰얌 탈레와 해물볶음밥을 시켜먹었는데 태국음식은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이 거리가 바로 상해 속의 유럽 카페들이 즐비한 신천지란 곳인데 임시정부청사에서도 가깝다. 서양인들도 많이 보이고, 건물과 인테리어도 이국적 매력을 풍긴다. 한국 여대생이 내가 보는 가이드 책을 보며 혼자 점심을 먹고 있다. 어학연수를 왔다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 예원으로 갔는데 춘절이라 그런지 인산인해였다. 그냥 사람에 떠밀려 다녔다. 시간이 너무 늦어 밖에서만 돌아봤다.

예원은 명·청시대의 대표적 건물양식으로, 권력가 반윤단이라는 사람이 부모를 위해 지은 인공 정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설립자가 죽고 가세가 기울자 지방 유지들이 재건하기도 했다.

그 후 서양의 침탈이 계속되던 19세기에는 영국·독일군의 군사시설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민중봉기가 일어나던 시기에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일부가 불타기도 했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원 주변의 예원상성은 상가 밀집 단지다. 말하자면 상해의 ‘그랜드 바자’라고나 할까? 기념품 등을 사기에 알맞은 곳이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 유명한 남상만두점 옆집에서 만두를 사먹었다. 만두 안에 육즙이 들어있는 게 특이했다. 입 데기 딱 알맞다. 어딜 가나 중국은 참 사람이 많다. 하기야 오늘은 춘절 연휴기간 중이다.

황포강 쪽으로 걸어 나왔다. 상해는 황포강을 중심으로 황포강 동쪽은 포동, 서쪽은 포서 등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푸둥은 황포강 동쪽이라는 뜻, 그러니 푸둥공항은 황포강 동쪽에 있다.

과거 조계지였던 와이탄에서 황포강 건너 푸둥의 야경을 구경했다. 현재 와이탄은 관광객들을 위해 조성된 관광 산책로를 말하는데 무슨 공사를 하는지 대체로 어수선했다. 7시가 넘으면 건물에 조명을 켠다.

와이탄 건축물들은 주로 20세기 초에 지어졌다. 주요 건물 앞에는 건축 연대와 양식을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특히 시계탑이 있는 ‘상하이세관’ 건축물은 유럽 고전주의와 르네상스시대의 특징을 가진 건축물로 지금도 매시간 마다 135kg의 추가 10톤 무게의 종을 치고 있다고 한다.

충남 예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1세 때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3·1운동 후 일본식 교육을 받기 싫어 중퇴했다.

19세 때 글을 몰라 아버지의 무덤을 못 찾는 무식한 청년을 보고, 자기 집 사랑방에서 야학을 열어 농민들을 가르쳤다. 22세 때에는 월진회를 조직해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고 근면과 협동을 강조했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났다. 중국 상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경축식장에 스프링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들어갔다.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사라카와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 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폭탄을 단상으로 던졌다.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해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등을 죽이고 노무라 등 많은 일본군에게 부상을 입혔다.

폭탄 투척 직후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일본 오사카로 후송돼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육군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25세를 일기로 한 짧지만 굵은 생애였다.

윤봉길 의사는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했고, 이것은 장제스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 신현수
시인ㆍ부평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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