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심혜진 시민기자]

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70)씨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 ‘에비앙’ 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을 통해 되짚어보려 한다. 이입분 씨는 내 엄마다. <기자말>

전날 끓인 콩나물국이 상해버렸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바깥에 있느라 미처 끓여 놓을 새가 없었다. 냄비째 냉장고에라도 넣어 놨더라면 좋았을 것을. 날이 이렇게나 더워진 걸 비로소 실감한다.

어릴 때, 이 무렵이면 엄마는 뽑아뒀던 냉장고 플러그를 다시 꽂았다. 우리 집에선 가을부터 봄까지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부엌 찬장과 항아리에 반찬과 양념을 보관했다. 그러다 요즘처럼 날이 더워 음식이 쉬이 상하는 시기가 오면 냉장고를 돌리고 음식을 보관했다. 아마도 전기세를 아끼려던 것 같다. 냉장고에서 물이라도 꺼내 마실라치면 “얼른 문 닫아, 전기세 나가”라는 소리가 뒤통수 너머에서 들릴 정도였으니까. 요즘도 나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얼른 닫아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곤 한다. 그땐 전기세가 그렇게나 많이 나왔을까?

“그럼. 얼만지 기억은 안 나지만 냉장고 켜면 전기세가 많이 나왔어.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전기도 적겠지만 그땐 초창기니까 크기도 작고 지금보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시끄럽고 그랬어.”

“그래도 좋지 않았어?”

“되게 좋았지.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김치가 안 쉬니까. 처음엔 뭐 넣어 놓을 만큼 많이 사 먹지도 못했어. 그냥 더울 때 보리차 시원하게 마시는 거, 김치 안 쉬는 거, 밥 안 상하는 거, 그게 제일 좋았지. 오이냉국도 해먹고. 그나마 우물물은 시원한데, 보리차는 미지근하게 마시는 거지.”

“냉장고가 없을 땐 어땠어?”

“밥이 제일 문제야. 아침에 한 밥을 점심까지 먹고, 저녁엔 새로 밥을 해 먹었어. 근데 아침에 한 밥이 뜨겁잖아. 뚜껑을 덮어 놓으면 쉬고, 안 덮으면 파리가 들어가. 그래서 집마다 어떻게 했냐면, 천장 서까래에다가 끈을 묶어서 거기에 바구니를 공중에 매달아. 그 바구니에 밥을 퍼서 뚜껑을 덮어 놓는 거야. 그럼 통풍이 되니까 쉬지 않지. 파리도 안 들어가고. 생선은 간을 짜게 해놓거나 말렸어. 대체로 그때그때 해 먹었지. 음식을 해서 놔두는 건 김치 정도밖에 없었어. 눈이 감길 만큼 시어도 그냥 먹는 거야. 밥이나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 었는데 뭐, 먹는 게 어디야.”

"그럼 냉장고는 언제 샀어?”

“결혼하고 막내 낳고. 느이 아빠가 쿠웨이트 갔다 온 해에 샀으니까 1980년이야. 동두천에 살았는데 거기 군대가 있잖아. 군용 면세품을 좀 싸게 샀어. 군인 중에 그런 거 파는 사람 많았어. 돈 있는 사람들은 벌써 사서 썼을 텐데, 그 무렵엔 못 사는 사람들도 한꺼번에 너도나도 사서 썼던 것 같아. 갑자기. 그래서 나도 얼떨결에 샀어.”

“오, 신기하다. 겨울에 안 튼 건 전기세 때문이었어?”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안 쓰던 거니까 꼭 필요할 때만 쓰자는 생각이었겠지. 동네 사람들 다 그랬어. 뭐든 아끼고, 안 쓰고, 그럴 때니까. 너희가 좀 커서는 겨울에도 그냥 썼어. 없을 땐 없는 대로 불편하다는 생각도 안하고 살았지. 다들 똑같이 없이 사니까. 근데 이젠 없으면 큰일 나는 거지.”

# 1965년, 금성사 국내 최초 냉장고 출시

처음 ‘냉장고’라 부른 물건은 지금과 모양과 작동방식이 많이 달랐다. 요즘으로 치자면 아이스박스에 가까웠다.

‘살림하는 집에 냉장고는 없지 못할 한 가지 세간입니다. 그러나 집집마다 사서 놋치 못하는 이유는 값도 빗싸려니와 날마다 얼음을 사서 너허야 할 것이니 얼음을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 없는 곳도 있을 것이니 불편한 일이고 (후략)’(1938.1.8. 동아일보)

그래서 여름철만 되면 신문마다 식생활에 주의하란 기사가 실렸다.

‘한여름 냉장고 없이 합리적인 식생활을 하자면 (중략) 음식은 그때그때 모두 먹어버리는 것이 제일 좋겠으나 저녁식사 후 음식이 남았을 경우에는 상하지 않도록 불에 끓여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고 쥐와 고양이를 조심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다 먹어치워야 한다.’(1960.6.23. 동아일보)

1959년 제너럴일렉트릭사의 전기냉장고가 수입됐지만 이를 살 수 있는 가정은 극소수였을 뿐더러 전기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집도 많지 않았다.

1965년 엘지의 전신인 금성사에서 한국 최초로 전기냉장고를 생산했다. 어른 가슴 높이도 안 되는 작은 크기에 문은 한 개 달려 있고 용량은 120리터에 불과했다. 금성 냉장고 출시 이후 냉장고는 수입 허가 품목에서 삭제됐다. 하지만 당시 국산 전자제품은 인기가 없었다. 값이 비싼 데다 선진국에 비해 기술이 한참 모자랐기 때문이다. 대신, 냉장고의 수요를 메운 건 밀수품이었다.

‘3년 전부터 금성사 제품이 나오기 시작한 후 냉장고의 외국수입은 불표시품목으로 전환하여 수입이 거의 없는 형편이지만 수요자는 국산품보다 외산을 더 많이 찾고 있다. 미군 PX(피엑스) 등 암 루트를 타고 시중에 흘러나오는 RCA(대형 문 2개)는 36만원까지 호가하고 있으며 작은 것이 18만원에 거래되고 있다.’(1967.4.28.)

국산 냉장고라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금성냉장고는 백화점 경품 1순위가 됐고, 금성에선 독특한 광고로 소비자의 마음에 호소했다. 연말 보너스 타는 시즌을 겨냥해 ‘67년의 마지막 보너스로 금성 전기냉장고를 장만할 생각은 없습니까?’(1967.12.11.)라는 문구를 실었고, ‘하루 298원으로 살 수 있는 최신 금성 전기냉장고’(1968.9.13.)라는 문구로 고가의 냉장고를 저렴하게 느끼게 하는 착시효과를 노리기도 했다.

이에 맞물려 가전제품을 월부로 판매하는 방식이 확산됐다.

‘최근 도시민 가계에 필수품으로 등장되고 있는 텔레비, 냉장고, 선풍기 등 고급 내구소비재가 많이 보급되면서 시중에는 월부전문점이 많이 늘었고 대규모 백화점에서도 월부판매액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가 하면 또 특정 상품메이커는 전용월부회사까지 설립하는 경향이 현저히 눈에 띄고 있다. (중략) 월부가 주는 혜택보다도 월부로 인하여 생계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서는 가계에 파탄을 끌어넣을 가능성마저도 짙은 것이다.’(1969.7.2. 매일경제)

# 냉장고 판매 늘면서 불행한 사고도 잇따라

금성사가 독점하던 냉장고 시장에 1972년 삼성전자를 비롯해 신일, 한일, 대한전선, 동남전기, 국제전기 등 회사 다섯 개가 뛰어들면서 판매 경쟁에 불이 붙었다. 1973년 금성사는 냉장고 값을 인하했으며, 같은 해 삼성은 국내 최초로 300리터 용량의 대형 냉장고를 생산했다. 신기술을 앞세워 ‘문 두 개 달린 냉장고’ ‘서리 없는 냉장고’ ‘아이스포켙 냉장고’ 등 해마다 신제품을 내놓는 이들의 활약에 소비자도 화끈하게 응답했다.

‘올여름 가전제품상가에 나타난 또다른 추세는 지난해부터 불붙기 시작한 냉장고의 수요가 금년 들어 더욱 급증한 것은 물론 규격도 대형화해가고 있다는 것. 냉장고는 73년까지 연간 5만대 내외가 생산, 판매되었다. 그런데 74년 들어서는 무려 2.4배가 증가한 12만8000대를 생산했고 금년 들어서만도 1월과 5월 사이에(중략) 8만1523대를 생산했다는 것.’ (1975.8.1. 경향신문)

냉장고 판매가 늘어나면서 불행한 사고도 발생했다. 1974년 열한 살 어린이가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해 숨졌고, 1978년엔 어린이 세 명이, 1979년엔 식육점용 대형 냉장고에서 어린이 네 명이 질식해 숨졌다. 1984년에도, 1992년에도 같은 사고가 이어졌다. 냉장고의 밀폐형 구조로 인해 냉장고 안팎의 압력차가 커 안에서는 문을 열기가 어려운 탓이다. 이에 냉장고를 아무나 열 수 없게 자물쇠를 달게 해달라는 요청도 있었지만 소수 의견에 그쳤다.

# 제조사 치열한 경쟁에 기술은 날로 발전

냉장고는 점점 크기가 커지고 기능이 다양해졌다. 위쪽에 냉장실이, 아래쪽에 냉동실인 냉장고가 잠시 나오기도 했고, 필요에 따라 달리 사용할 수 있게 냉동 칸을 냉장 칸으로 바꾸는 기능을 추가하기도 했다.

광고 경쟁도 치열했다. ‘최초’ ‘유일’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고, 신문 기사 형식으로 회사 제품을 홍보하는 교묘한 광고기법도 등장했다. 급기야 냉장고 판매를 둘러싸고 상대방을 비방한 삼성전자와 대우전자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 명령을 받았다.(1988.2.6. 경향신문)

냉장고 기술은 날로 발전했다. 1990년 공업진흥청은 국산 냉장고가 외국산 제품에 비해 전력 소비와 소음, 성에 제거 시 냉동실 온도 변화 등 성능이 우수한 반면, 가격은 절반 수준임을 발표했다.

한편 1990년대 중반, 수입산 대형 양문형 냉장고를 찾는 이들이 늘었다. 그러자 1997년 삼성전자에서 양쪽으로 문을 여닫는 방식의 670리터 대형 냉장고에 ‘삼성’ 대신 ‘지펠’ 브랜드명을 달아 출시했다. 이에 금성사는 1995년 LG(엘지)로 회사명을 바꾸고 1998년 초대형 양문형 냉장고 디오스(DIOS)를 출시했다. 마침 1997년 말 외환위기로 경제 불황이 찾아와 수입제품에 비해 저렴한 국내 브랜드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지펠과 디오스는 선전하며 지금까지 브랜드를 유지해오고 있다.

# 가득 찬 냉장고, 냉장고는 죄가 없다

사실 그날 나는 콩나물국 냄비를 냉장고에 넣을 수 없었다.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냉동실도 가득 차 있긴 마찬가지다. 양문형 냉장고가 인기를 끌면서 냉동식품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 냉동 칸은 언제나 뭔가로 가득 차서 터질 지경이다. 냉장고에서 상한 식재료와 오래된 음식을 버릴 때면 뭇 생명과 지구 환경에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마음이 괴롭다. 엄마 말대로 냉장고가 없다면 그때그때 먹을 만큼만 음식을 구입하고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다. 냉장고를 탓해 무엇 하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사람의 식탐과 무신경함, 게으름이 문제다. 지금 당장 냉장고를 싹 비우고 ‘텅 빈 충만’을 느끼며 수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당분간 냉장고 파먹기 작전에 돌입해야겠다.

※ 심혜진은 2년 전부터 글쓰기만으로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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