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 (3)
[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 (3)
  • 김갑봉 기자
  • 승인 2019.05.1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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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어장터 만세운동 지도자 심혁성 지사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심혁성 지사, 장기리 황어장터 만세시위 주도

심혁성 지사는 인천 황어장터(현재 계양구) 만세운동의 지도자다. 심 지사는 1888년 8월 15일생으로 본적과 출생지는 당시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 22번지로 현재 계양구 오류동이다.

심 지사는 당시 32세였고, 키는 155cm 가량이며 직업은 농민으로 나온다. 1919년 11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가 1920년 4월 10일 가석방됐다.

‘독립운동사’를 보면, 심 지사는 1919년 3월 24일 오후 2시 무렵 계양면 장기리(場基里) 장터에서 군중 3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이궁희삼차(二宮喜三次) 등 일본순사(경찰) 4명은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감시하던 중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심 지사 등을 현행범이라고 체포하고 계양면사무소로 끌고 갔다. 면사무소에서는 심 지사를 놓아주라고 했으나, 일본 경찰 주재소로 데리고 갔다.

군중 100여 명이 뒤를 따라가며 만세시위를 하면서 심 지사를 놓아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 경찰과 안면 있는 임성춘(林聖春)은 일본 경찰들과 석방을 교섭하는 한편 뒤로는 여러 사람을 시켜 심 지사를 빼오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군중은 “어서 그 사람을 놓아 달라”고 소리 지르며 경찰의 앞길을 막았다.

“순사 놈이 사람을 죽였다. 순사를 죽여라”

군중이 실력으로 심 지사를 탈취하려하자 일본 경찰은 취조하고 바로 석방하겠다며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안 될 말이다”라는 외침이 나왔고, 누군가 일본 경찰의 뒤통수를 치자 군중이 일제히 몰려와 심 지사를 빼냈다.

일본 경찰은 칼을 빼 들고 군중 속으로 달려들었고, 이 과정에서 이은선(李殷先)이 일본 경찰의 칼에 찔려 숨졌다. “순사놈이 사람을 죽였다” 군중들은 흥분했고, 이영춘(李永春)이 급히 뛰어가 이은선의 6촌 이담(李潭)에게 알려 이담이 급히 달려왔다.

흥분한 군중은 “순사를 죽여라” 하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질을 했다. 이때 지원 경찰 3명이 나타나 심 지사를 주재소로 끌고 갔다.

이날 저녁 계양면사무소에 군중 100여 명이 모였다. 이담은 군중을 향해 “주재소에 가서 이은선을 죽인 이유를 따지자”고 했다. 이담, 최성옥, 전원순, 이공우 등 천도교인, 기독교인, 농민 100여 명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려 했다. 이들은 일본말 통역으로 데려가려고 면서기 이경응을 찾았으나 이경응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경응의 집으로 가자” 흥분한 군중은 이미 자정이 넘었으나 단숨에 이경응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이경응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성난 군중은 이경응의 집을 박살냈다.

“심혁성은 일한합병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조선독립을 희망”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이는 모두 5명이다. 심 지사를 포함해 이담(李潭ㆍ41ㆍ농민ㆍ계양면 이화리 248번지), 최성옥(崔成玉ㆍ48ㆍ농민ㆍ계양면 이화리), 전원순(全元順ㆍ45ㆍ노동자ㆍ계양면 장기리), 임성춘(林聖春ㆍ47ㆍ상인)이다. 이들은 공소(=항소)했으나 모두 기각됐다(판결 대정 8년 형공제969호)

경성복심법원(형사부ㆍ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총원우태랑 塚原友太郞)은 1919년 12월 13일 “조선총독부 검사 수야중공(水野重功) 관여로 보안법 위반ㆍ소요ㆍ훼기(毁棄)ㆍ직무집행 방해로 10월 29일 경성지방법원이 피고 심혁성 등에게 언도한 유죄 판결에 대해 피고들이 제기한 공소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조선총독부 재판부는 “피고 심혁성은 전부터 일한합병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다”라며 “대정 8년(1919년) 3월 1일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민족독립선언을 한 다음 조선 각지에서 독립시위운동이 시작되자 그 취지에 찬동하여 이와 동일한 행동을 하려고 동년 3월 24일 오후 2시경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 시장에서 태극기(증 제1호)를 휘두르며 모여든 군중을 선동해 같이 조선독립 만세를 절규함으로써 독립시위운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치안을 방해했다”고 했다.

임성춘은 일본 경찰이 심 지사를 체포하자 만세 군중에게 심 지사 구출을 지휘하고 순사들의 머리 등을 주먹으로 치고, 심 지사를 묶은 포승을 풀어 도망치게 하고, 순사들이 이를 추적하려하자 막아서서 순사들을 때리고 돌을 던져 방해한 혐의를 받았다.

이담은 순사가 빼든 칼에 6촌 이은선(李殷先)이 찔려 죽자 면민 200여 명을 규합해 일본 경찰에 항의하려했다. 이담은 통역으로 면서기 이경응(李敬應)을 데려가려고 했으나 자취를 감추자 군중에게 ‘이경응은 자신이 범한 죄가 있어서 여기에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그의 집을 부숴 버리라’라고 선동한 혐의를 받았다.

최성옥과 전원순은 계양면 선주지리(仙住地里) 이경응의 집으로 몰려가 전원순은 그 집의 바람벽을 부숴 기구를 깨뜨리고, 최성옥은 그 집의 대문과 바람벽을 손상하고 파괴하고 소요를 피운 혐의를 받았다.

조선총독부 재판부는 1심에서 이담을징역 2년, 임성춘을 징역 1년, 전원순과 최성옥을 각각 징역 10월에 처하고 만세를 주도한 심혁성에겐 징역 8월을 선고했다.

심 지사는 옥고를 치르고 난 후 논과 밭,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한 뒤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식구를 거느리고 산골로 은신한 것으로 나온다. 심 지사는 30년 가까이 전국을 방랑하며 약초를 캐서 연명하는 한편 만주 등지를 왕래하며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을 함께했다.

[도움말ㆍ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