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포도처럼 당도가 높은 과일의 껍질에는 효모가 자생하고 있어 과일이 충분히 익으면 자연적으로 발효한다. 그런 과일에 비해 단단한 껍질로 싸여있는 곡식은 상대적으로 발효시키기 까다롭다. 따라서 인류는 먼저 과일주에 취했을 것이고 곡주는 후에 마시게 되었을 것이다.

최초의 곡주는 보리나 밀의 알갱이가 물에 불어 자연 발효된 것을 인류가 발견하고 이런 곡물로 술을 빚어 마시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과일주가 별다른 작업 없이 자연 상태에서 발효하는 것에 비해, 곡물을 제대로 발효시키려면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만들기 어려운 곡주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은 곧 곡물 재배와 직결되고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농경의 발전은 인류가 정착해 문화를 발달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농사와 불가분의 관계인 맥주는 결과적으로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스라엘 카르멜 산의 동굴에서 발견된 1만3000년 전의 돌절구.(출처·고고과학저널리포트┃드로르 마얀┃아나트레게브기기스)

빵이 먼저인가, 맥주가 먼저인가

인류가 농사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인구과잉에 따른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학설이 있고, 빵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맥주를 만들기 위해 농경생활을 시작했다는 학설이 있다.

위스컨신대학의 조너선 사워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빵보다는 맥주를 만들기 위해 보리를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키게 된 결정적 계기인 농사의 시작이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주장은 얼핏 믿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술을 탐닉하는 것이 본능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유가 맥주를 만들어 마시기 위해서라는 주장은 지극히 타당하다. 많은 문화권에서 빵 굽는 방법보다 맥주 만드는 방법을 먼저 알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맥주가 인간에게 중요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발굴이 계속되면서 맥주 양조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계속 발견되고 있고, 가장 최근 발견된 사실은 빵을 만들기 훨씬 이전인 1만 3000년 전에 맥주를 만들어 마셨다는 것이다.

스탠포드대학의 고고학자 류리 박사의 연구팀은 이스라엘 카르멜 산의 선사시대 동굴에서 발견된 1만3000년 전의 돌절구 세 개에서 맥주 양조의 증거를 발견했다. 돌절구 두 개는 밀과 보리 엿기름을 보관한 용기였고, 한 개는 곡물을 빻고 맥아를 발효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다. 연구팀은 구석기와 신석기 사이에 살았던 이 나투프인들이 야생 보리와 밀을 물에 넣어 발아시킨 뒤 말리고, 이를 짓이겨 끓인 뒤 공기 중의 야생 효모로 발효시켜 맥주를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이는 현대의 맥주 제조과정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연구팀은 고대의 방법으로 실험실에서 맥주를 제조해봤고, 동굴의 돌절구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녹말 알갱이가 생기는 것을 확인했다. 이 발견은 인류가 농사를 짓기 훨씬 이전에 맥주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오래전 고고학계에서 제기된 학설인 인류가 맥주를 만들기 위해 농경생활을 시작했다는 학설을 뒷받침한다. 빵이 먼저인지 맥주가 먼저인지는 오랜 시간 논쟁거리였는데, 이제 결론이 난 셈이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한 이유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책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한 것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지적했다. 수렵생활을 하던 석기시대 인류는 훨씬 적은 노동을 하고 더 풍요롭게 살았는데,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게 됐다는 말이다. 수렵ㆍ채집생활은 사냥감만 풍부하다면 농경생활에 비해 더 여유로운 생활이다. 사냥감과 채집물이 줄어들면 계속 이동했기에 정착생활을 하지 못한 대신에 더 자유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수렵 채집 과정에서 인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인류의 수렵ㆍ채집 생활양식은 대략 1만 년 전에 농사를 시작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인류가 농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기원전 9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였다. 농사는 수렵ㆍ채집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농사로 식량의 총량이 증가했지만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농부들은 수렵ㆍ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지만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사를 짓는 데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더 많은 자녀를 낳았고,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노동시간은 더 길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애초 인류의 신체조건은 수렵ㆍ채집에 적합하게 진화했기에 농사에 적합하지 않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며 인류는 당뇨, 디스크, 관절염 등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다. 이런 이유로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단언했다.

맥주를 더 많이 더 오래 마시기 위해

곡류를 위주로 하는 식단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부족하고 소화시키기도 어렵다. 수렵ㆍ채집인은 다양한 먹거리에 의존해 살았기에 저장한 식량이 없어도 잘 견딜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수렵ㆍ채집생활에 비해 더 나을 것이 없는 농사를 시작했을까? 위에서 살펴봤듯이 더 나은 식사나 여유로운 생활을 위해 수렵ㆍ채집생활을 포기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논리적인 답변은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과실주를 만들 수 있는 시기는 매우 제한적이다. 반면 곡물은 비교적 오랜 기간 저장할 수 있다. 따라서 곡주는 과실주에 비해 양조할 수 있는 기간이 더 유연하고 길다. 맥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더 오랜 기간동안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농사가 더 나은 식사를 보장해준 게 아니고, 따라서 먹거리를 위해 농경생활을 시작했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맥주를 더 많이 더 오랜 기간 마시기 위해 농사를 시작했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하고 난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잘 알려져 있다. 정착해 촌락을 이뤘고, 인구가 늘어났고, 잉여인력인 지배계급이 생겨났으며, 도시와 국가를 이뤘다. 이 모든 게 맥주를 만들어 마시기 위해 시작한 농사에서 비롯되으니 맥주는 인류 발전의 원초적인 동력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완벽하게 만족한 사람은 입에 맥주가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인류가 고된 농사일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은, 맥주가 주는 완벽한 만족감을 누리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전영우는 오랜 동안 인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금은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해 맥주를 만드는 등, 맥주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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