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 (2)
[연재] 일제가 감시한 인천의 독립운동가 (2)
  • 김갑봉 기자
  • 승인 2019.05.0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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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김삼수·임갑득 지사 … 인천보통학교는 동맹휴업, 상인들은 철시로 일제에 항거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인천보통학교 학생들 동맹휴업으로 만세운동 독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타올랐다. 3ㆍ1운동 토대 위에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독립운동사’를 보면, 인천에서는 3월 7일부터 만세 시위가 시작됐고, 3월 9일에 300여 명이 동참했다. 시위행진은 모두 8회였다.

인천 상인들은 3월 30일부터 철시(撤市)로 일제에 항거했다. 일본경찰이 개점을 협박해도 눈가림으로 문을 열었다가 곧 닫아버렸다.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항거했고, 격문을 비밀리에 살포했다. 3월 27일 조선인 가게엔 출처를 알 수 없는 격문이 날아들었다. 격문 내용은 ‘독립 만세’를 부를 것과 철시하라는 것이었는데, 학생들이 작성한 격문이었다.

당시 인천부 부윤(일본인)은 경찰서에 조선인 상점을 개점하게 하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쉽사리 문을 열지 않았다. 4월 1일 이후에는 조선인 상점이 거의 문을 닫을 정도였다.

인천공립보통학교(민족자본으로 설립한 학교, 현 창영초등학교) 등 인천의 각 학교는 3월 6일부터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교직원들은 경찰의 압력에 학교 상황을 보고해야했다.

김명진 지사, 학교와 경찰이 감시하자 전화선 절단

김명진·김삼수·임갑득 지사의 조서. (자료 제공 인천역사문화센터)
김명진·김삼수·임갑득 지사의 조서. (자료 제공 인천역사문화센터)

학생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 3학년 학생 김명진(金明辰)ㆍ이만용(李萬用)ㆍ박철준(朴喆俊) 등은 학교와 경찰이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전화선을 끊어버렸다. 이들은 3월 8일 오후 9시께 우각동(牛角洞)에 있는 인천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준비한 전선 절단용 가위로 2층에 있는 전선을 절단하고 수화기를 박살냈다. 김명진은 밖으로 나와 망보던 박철준과 함께 유유히 돌아왔다.

이 일로 김명진(18)ㆍ이만용(18)ㆍ박철준(19)ㆍ손창신(16)은 재판을 받았다. 김명진은 경기도 인천부 내리 152번지에 거주한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 이만용은 인천부 용강정 81번지에 거주한 인천보통학교 학생이었다. 인천부 용리 228번지에 거주한 박철준은 직업이 없었고, 손창신은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원시리에 집이 있으나 인천부 내리 143번지 거주한 인천보통학교 학생이었다.

일제는 이들에게 보안법 위반, 전신법 위반, 절도죄를 적용했다. 조선총독부 검사 옥명우언(玉名友言)이 심리하고 판결했다. 김명진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고, 이만용과 박철준은 태형 90대에 처하게 했다. 손창신에겐 무죄를 선고했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판결문의 양형 이유를 보면, 김명진은 인천공립보통학교 3년생으로서 1919년 3월 6일 이후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교를 하고 있었고, 학교 직원과 관할 경찰서는 전화로 동맹휴교 중인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김명진은 학교와 경찰서 간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이만용ㆍ박철준 등과 8일 오후 9시께 인천보통학교 전화선을 절단했다. 박철준은 망을 봤고, 김명진은 2층에서 공중선을 절단한 뒤 1층 사무실에서 전화 수화기를 부쉈다. 이만용은 중간에 집으로 돌아갔다.

상해 <독립신문>도 인천의 항거 소식 전해

조선총독부는 김명진이 수화기를 부수고 일부를 가져갔다며 절도죄도 적용했다. 아울러 김명진과 박철준에게 가택침입죄와 통신방해에 따른 전신법 위반을 적용하고 두 혐의 중 무거운 죄를 적용했다. 김명진의 경우 전신법 위반죄가 더 무겁다며 징역 2년을 선고했고, 이만용과 박철준에겐 징역 3월을 선고했다. 손창신의 경우 공소 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상해임시정부가 1920년 6월 5일 발행한 <독립신문>을 보면, 인천 소식에 김명진ㆍ김삼수ㆍ임갑득 지사 등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독립신문>은 “인천 작년 3월 25일경에 인천부 내 기독교인 및 학생 15명이 같이 모의하고 주두장(콩류판매시장)에서 만세를 고창하다 적경(=일제 경찰)에게 잡힌 인사 중에 김명진(19)은 1년 6개월, 권인일(29)과 김삼수(26) 두 사람은 10개월 징역에 복역하는 중이요”라고 보도했다. 이어서 “한태억, 신태영, 신영수, 이태규, 곽상훈, 박피득, 강흥석, 임갑득, 손창신, 박철준 등은 출옥했다”고 전했다.

김삼수·임갑득, 철시 독려하다 체포돼

상해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에 등장한 김삼수(19)ㆍ임갑득(16세) 지사도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김삼수(金三壽)ㆍ임갑득(林甲得)은 인천 내리에서 조선 상인들이 일제에 철시로 맞서고 있을 때, 일부 개점한 곳이 있자 철시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쓰겠다는 격문을 만들어 4월 1일 오후 11시께 인천 우각리 이복현(李福鉉) 등 점포 17개에 살포했다.

일본경찰은 조선 상인의 철시를 탄압하고, 개점을 강요했다. 두 지사의 재판 당시 경찰 측 증거로 제시된 주명서(朱明瑞)의 조서를 보면, “대정 8년(1919년) 3월 30일 및 31일의 양 일에 폐점했으나 경찰관의 간곡한 설유로 개점했다. 이튿날 오후 8~9시경 펜으로 쓴 증 협박문을 나의 집에 투입한 자가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약간 놀랐으나 아직도 폐점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나온다.

철시 독려에도 불구하고 우각동 일대에서 개점하자 김삼수와 임갑득은 4월 2일 다시 ‘경고(警告)’라는 제하에 “인천에 있는 상업가 여러분이 철시하지 않으면 인천시가는 초토화할 것임을 알아야한다”는 경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이들은 이 같은 경고문을 내리에 있는 장지섭(張智燮) 등 여러 명의 가게에 집어넣었다. 더 이상 개점하지 말라는 최후의 통첩이었다.

그래도 내리에 있는 상점들이 철시하지 않자, 제3차로 4월 3일 탄산지를 사용해 ‘최후통첩(最後通牒)’이라는 제하에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취할 것이다”라는 경고문을 작성한 뒤, 내리에 있는 점포에 넣으려다가 체포됐다. 일제는 “모두 정치에 관해 불온한 행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자들”이라고 했다.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수록된 3ㆍ1운동 관련 김삼수(金三壽)와 임갑득(林甲得) 지사 판결을 보면, 1919년 19세이던 김삼수 지사는, 본적과 주소가 인천부내리 193번지이고 잡화상인으로 나온다. 임갑득 지사는, 본적은 인천부 우각리 55번지이고 주소는 외리 164번지이며 객주집(여관) 사환(급사)으로 나온다.

조선총독부(검사 최호선)는 김삼수와 임갑득 지사에게 협박ㆍ업무방해죄를 적용해 징역 10월에 처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들이 작성한 격문과 경고문 등을 불온문서로 취급했는데, 문서 15통과 복사문 2매를 압수했다.

조선총독부는 두 지사가 치안을 방해해 보안법과 형법을 위반했고, (철시) 강요 미수는 형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했다. 또한 연속해서 철시를 독려한 것도 형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했다.

[도움말ㆍ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